주위 만류에도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폭발적인 인수합병 단행

[조은뉴스=김대기 기자]   세계 네트워크 장비 시장의 2/3를 석권하고 있는 미국의 네트워크 통신회사인 시스코 시스템즈(Cisco Systems)는 네트워크 전반에 걸친 모든 영역에서 시장 점유율 1∼2위를 차지하는 명실상부 업계 리더, 글로벌 리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시스코는 현재 전세계 70개국에 300여 개의 사무소를 갖고 있으며 직원 수만 해도 6만 7,318여 명(2009년 1월 기준)에 이르는 세계적인 기업이다. 또한 시스코는 미국 최대의 성공 기업으로 손꼽히고 있다. 시스코의 연간 매출액은 1990년 상장 당시 6,900만 달러였다. 하지만 2007 회계연도에 349억 달러를 기록, 상장 17년 만에 거의 500배 이상의 폭발적인 성장을 보였다. 2008 회계연도에도 359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한 시스코는 꾸준히 높은 매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메일로 연애편지 주고받다가 ‘라우터’ 개발
1970년대 후반, 미국의 스탠포드 경영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샌드라 러너(Sandra Lerner)와 컴퓨터 공학도였던 레너드 보삭(Leonard Bosack) 커플. 이 연인은 이메일로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같은 캠퍼스 내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사용하는 컴퓨터는 각기 다른 건물에 있다는 이유로 네트워크가 호환되지 않아 많은 불편을 겪어야만 했다. 해결책을 찾던 이 연인은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라우터(router)’를 개발하게 됐고 이것이 시스코의 발단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최초’는 아니었다. 이미 다른 곳에서도 이와 관련된 연구들이 계속 되고 있었고 가깝게는 스탠포드 내에서도 ‘빌 이거’라는 엔지니어가 라우터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 그런 와중에 레너드와 샌드라가 연구 개발에 성공한 것이었다.
이들은 스탠포드를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로 삼았다. 학교의 허가나 지원은 없었지만 캠퍼스의 컴퓨터 케이블로 작업을 하고 서버, 컴퓨터, 라우터를 연결하는 것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다가 서로 다른 네트워크를 연결해 네트워크를 호환시킬 수 있는 라우터를 개발하게 되었다. 이 소식에 타 대학, 연구소 등에서 이것을 사고 싶다는 주문이 물밀듯 들어왔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개발한 라우터를 스탠포드 대학 중심 프로젝트로 활성화시켜 사업을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 달리 학교에서는 성공보다는 실패를 염두에 두어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결국 학교를 떠나 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아 1984년 회사를 창업하게 되고 회사가 위치한 샌프란시스코의 지명에서 이름을 따 사명을 시스코 시스템즈(Cisco Systems)라 정했다. 회사 로고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금문교를 따 디자인했다. 시스코의 사업본부는 이들이 거주하는 집의 거실이었고 나중에는 집 전체가 하나의 네트워크가 되었다.
1987년부터는 시스코라는 이름의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패키지를 출시해 수익을 올리기 시작한 이들은 이 정도 선에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회사의 몸집을 키우기로 마음먹고 자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벤처캐피탈 회사에 투자를 요청했지만 발 벗고 나서주는 이들은 없었다. 벤처 자본가들에게 라우터는 그들의 자본을 투자할 만큼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돈 밸런타인의 혜안은 이들의 라우터를 알아보았다.

수혈한 젊은 피 ‘챔버스’, 현재까지 CEO로 건재
시스코의 창업자인 이들은 벤처 캐피탈 세코이아 캐피탈의 캐피탈리스트이자 시쿠아시스템즈 창업자인 돈 밸런타인에게 250만 달러를 투자받고 시스코 주식 30%와 4년간의 경영권을 넘겨주었다. 하지만 밸런타인의 시스코 입성은 시스코에게는 새로운 바람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창업자에게는 매서운 칼바람이 되어 돌아왔다.
경영권을 갖게 된 밸런타인은 CEO를 포함한 경영진을 대거 영입하며 조직에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로운 경영진과 창업자 사이에 불협화음도 동시에 일기 시작했다. 경영진들에게 창업자, 특히 샌드라 러너는 다소 반항적이며 기업가의 면모에 어울리지 않게 자유로웠다. 때문에 이들은 사사건건 부딪히기 일쑤였고 결국 부사장 7명은 더 이상 창업자들과 일할 수 없다고 선언해버렸다. 이 과정에서 밸런타인은 자신이 영입한 부사장들의 손을 들어 주었고 창업자는 부사장들의 억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1990년, 2/3에 해당하는 자신들의 주식을 1억 7,000만 달러에 처분하고 회사를 떠났다.
이후 시스코의 첫 전문경영인으로 존 모그리지(John Morgridge)가 등장했다. 모그리지는 거시적인 계획보다 성과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1개년 계획 수립을 통해 빠른 목표 달성으로 직원들의 사기를 충족시켜 주었다. 또한 스톡옵션과 성과급제도 역시 직원들의 의욕을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 제도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시스코의 고객지향, 위험감수, 개방적 경영 등의 전통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모그리지는 회사를 위해서는 자신보다 시대와 시스코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젊은 경영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젊은 피 수혈을 위해 후계자 물색 작업 중이던 돈 밸런타인과 존 모그리지는 평소 눈 여겨 봤던 부사장 존 챔버스(John Chambers)를 점 찍어두고 그를 지켜보기로 했다.
존 챔버스는 IBM 영업부에서 사회의 첫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그에게 IBM의 기업문화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고객과도 점차 거리가 벌어진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온전히 충족되지 않는 열정을 품은 채 6년의 세월을 IBM에서 보낸 그는 1983년 왕(Wang) 컴퓨터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해외영업 담당, 미국지역 부사장자리까지 올랐다. 왕 컴퓨터연구소는 미니컴퓨터를 생산하던 회사로 한 때 IBM을 위협하기도 했으나 PC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않아 도태되어 가고 있는 회사였다. 또한 시장에서의 어려움으로 인해 4,000명이라는 직원을 대량감원 해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결국 그는 감원을 단행하고 챔버스 자신도 회사에서 나왔다.
IBM과 왕 컴퓨터연구소에서의 경험은 챔버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IBM에서는 고객과의 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을, 왕 컴퓨터연구소에서는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 회사 운영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깨달음 끝에 만난 곳이 시스코였다. 존 모그리지의 부름이었다. 1991년 시스코의 해외수석 부사장으로 새로운 둥지를 튼 챔버스는 현재까지도 건재하게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꾸준한 인수합병 전략으로 영역 넓혀가기

시스코는 미국 내에서도 빠른 속도로 성장한 기업으로 손에 꼽힌다. 창립 15주년을 앞두었던 지난 1999년 말에는 시가총액이 GE와 MS에 이어 3,000억 달러를 넘는 역사상 세 번째 기업이 되었으며 2000년 3월24일에는 5,792억 달러로 세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특히 2000년부터 2001년까지는 직원이 2배가량 증가하는 등 상상 이상의 폭발력으로 성장해왔다.
지금의 시스코가 있기까지는 ‘인수합병’이 큰 몫을 했다. 인수합병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만 작용하던 당시에 시스코는 일찌감치 이를 기업 전략으로 도입했던 것이다. 모그리지가 챔버스를 영입해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기까지 4년 동안 곁에 두고 생생하게 경영 노하우를 전수해준 것도 대부분이 인수합병 전략이다.
1993년 시스코는 크레센도 커뮤니케이션즈를 사들였다. 이 회사는 연 수익 1,000만 달러도 되지 않는 작은 회사였고 당연히 주위에서는 만류했다. 하지만 시스코는 온갖 우려에도 불구하고 인수를 단행했다. 시스코가 겉으로 보기에는 작은 회사일지 모르는 크레센도를 사들인 데에는 잠룡의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 시스코는 보잉사와 라우터 계약을 앞두고 있었다. 보잉사는 시스코의 라우터 외에 스위치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크레센도가 이 스위치를 생산하는 회사였던 것. 포드자동차도 마찬가지였다. 계약 관계에 있는 회사들이 스위치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니 시스코의 입장에서 크레센도는 놓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게다가 스위치는 라우터의 소프트웨어가 하는 기능을 하드웨어만으로 가능하도록 하는 신기술이었다. 크레센도만 잡으면 보잉사, 포드자동차와의 사업 관계도, 스위치도 모두 시스코의 품으로 들어오게 되는 뻔한 결과를 두고 시스코가 크레센도를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알고 보면 시스코에게 크레센도는 당연한 전략이었던 셈. 그래서 시스코는 크레센도를 1억 달러라는 과한 대가를 지불하며 사들였고, 곧 이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 크레센도가 1996년에만 5억 달러가 넘는 돈을 벌어들인 것이다.
1996년에는 대형 네트워크용 스위치를 만드는 스트래터컴을 45억 달러에, 1998년 셀시어스 시스템즈를 인수해 IP 기반 통합 커뮤니케이션 솔루션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올라서게 된다. 1999년에는 광통신 장비회사 세런트를 70억 달러에 사들였다. 크레센도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챔버스를 말렸다. 70억 달러나 주고 사들이기에 세런트는 인지도도 극히 낮을 뿐 아니라 역사도 짧은 신생회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스코는 또 한 번의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크레센도가 그랬듯 세런트도 시스코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시스코의 생각이 맞았다. 광통신 장비시장으로 진출하려는 시스코에게 세런트는 발판이 되어 주었다. 이렇게 시스코는 인수합병을 통해 자신들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갔다.
시스코는 여전히 인수합병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지난 10월에만 해도 세 곳의 회사를 인수하겠다고 밝힌 시스코는 비디오컨퍼런스 기업인 탠드버그를 30억 달러에, 무선이동통신 장비업체인 스타렌트 네트웍스를 29억 달러, 인터넷 보안업체 스캔세이프를 1억 8,300만 달러에 인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들 회사의 인수 작업은 내년 상반기까지 마친다는 계획이다.
창립 이래 시스코가 인수합병을 한 기업 수는 현재 130개를 넘어섰다. 특히 1999년과 2000년에는 숨 쉴 틈도 없이 기업들을 사들였다. 1999년에는 18개 회사를 인수했으며 이듬해에는 28개 회사를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시스코가 화상회의, 무선, 가전제품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감에 따라 전략적으로 이와 관련된 회사들을 꾸준히 사들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국내에 5년간 20억 달러 투자, R&D센터에 집중
시스코는 지난 3월, 네트워크 장비와 서버, 그리고 가상솔루션을 통합한 데이터센터 플랫폼 유니파이드 컴퓨팅 시스템(USC)을 공개했다. 이미 IBM의 핵심 사업 중 하나인 USC에 도전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 했다. 하지만 시스코는 또 한 번 그들의 장기인 ‘주위의 우려에도 과감하게 도전하기’를 실행에 옮겼다.
시스코는 3월16일 “서버 따로, 스토리지 따로, 네트워크 따로, 가상화 솔루션 따로 공급 되는 현재 상황에서 서버시장은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는 생각이 반대로 서버시장에 뛰어들게 된 이유”라고 밝혔다. USC가 이 모든 기능을 한꺼번에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시스코의 USC는 인텔의 네할렌이 시스템과 프로세서 공급을 맡고 OS는 마이크로소프트와 레드햇이 담당하는 등 여러 업체가 참여하는 통합솔루션이다.
한편, 존 챔버스는 지난 4월 방한해 이명박 대통령과 면담을 갖고 향후 5년간 국내에 총 20억 달러(2조 6,000억 원) 규모를 투자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시스코는 먼저 인천 송도국제 업무단지에 총 11억 달러 이상을 투입해 지능형 도시개발 및 글로벌 R&D센터를 설립키로 했다. 이에 앞서 시스코는 2월 인천시와 송도신도시에 최첨단 국제도시를 구축하는 내용의 양해각서(MOU)를 교환했다. 이 센터는 새로운 개념의 도시인 U시티 공략을 위한 지능형 도시화와 관련된 혁신적 기술 및 솔루션을 개발하고 테스트 해 이를 전 세계 신도시 개발 프로젝트의 레퍼런스로 활용하고 확산하는 글로벌 R&D센터 역할을 담담하게 된다. 20억 달러 중 절반 이상은 지능형 도시개발 및 R&D센터 설립에 집중 투자할 예정이다.
이 날 챔버스 회장은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앞선 IT인프라와 고급인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녹색성장 전략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앞서 있다”면서 “이번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추진해 다른 중진국과 개도국으로 수출할 수 있는 모델로 삼으려 한다”고 밝혔다.
시스코는 1998년 이후 11년 연속 포춘지가 발표한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에 포함되고 있다. 2008년에는 6위까지 올랐다.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는 업계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시스코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한계를 모르고 달려온 지난 25년처럼 앞으로도 시스코의 한계는 당분간 가늠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시스코 코리아
1994년 9월에 설립된 시스코 코리아(조범구 대표)는 현재(2009년 7월 기준) 약 300여 명의 전문가를 보유한 국내 최고의 네트워크 기업이다. 핵심 장비인 라우터, 스위치, 네트워크 보안, 스토리지, 무선랜, 광, 그리고 IPCC(IP컨택센터)를 포함한 통합 커뮤니케이션 등 네트워크 전반에 걸친 모든 사업 분야에서 네트워크 일등 기업으로 성장했다.
2007년부터는 가정용 전자제품 간의 상호호환을 위한 네트워킹 솔루션 분야에 주력하는 등 끊임없는 기술 혁신과 최고의 레퍼런스를 통해 명실상부한 네트워킹 솔루션 분야의 선두주자로 이 분야 시장을 이끌고 있다.
국가 5대 기간 망 중 하나인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의 초고속연구망을 비롯해 한국 최초의 상용인터넷망인 데이콤의 보라넷과 데이콤의 KIDC, KT의 코넷에도 장비를 공급해오고 있는 시스코 코리아는 다양한 협력사를 대상으로 한 기술이전 교육, 유지 정비 기술 교육에 힘쓰는 한편, 지난 1997년 7월에는 시스코 네트워크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국내에 처음 도입했다. 이후 이 프로그램을 전국의 대학과 교육기관으로 확장, IT 전문인을 꿈꾸는 학생과 네트워크 엔지니어들을 대상으로 전문 네트워크 교육을 지원해왔다.
이 밖에도 시스코 코리아는 초, 중, 고,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회사견학 및 무료 IT 교육 실시, 해비타트운동 및 농촌봉사활동, 태안오염지역 기름제거 봉사활동 등 한국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고객과 사회의 행복을 성장시키고 공유하고자 다양한 사회공헌 및 봉사활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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