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옥중에서 생각하기를 성경에 나오는 성령 공동체와 조상들이 이루어 왔던 두레 공동체를 합하면 어떤 모습이 나타날 것일까를 생각했다. 그런 생각 끝에 두레마을을 세워 두레공동체운동을 펼치기로 다짐하였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곧이어 청계천 판자촌에 철거령이 내렸다. 서울시에서 지하철 차고를 짓는데 우리들이 살고 있는 청계천 판자촌 지역이 건축 부지로 선정되었기에 전면 철거하겠다는 통보였다.

우리들은 교회 대표들과 주민회 대표들이 교회당에서 모여 며칠간 토론하고 토론하였으나 별다른 대책이 나오지 못했다. 교회는 농촌으로 집단 귀농하여 농사를 지으며 세금도 내고 자식들도 기르면서 자립하면서 사람 구실하며 살자고 방침을 세웠다. 그래서 귀농지로 선택한 곳이 경기도 화성군의 남양만 간척지였다.

간척지로 내려갈 때는 50 세대 단위로 이스라엘의 키브츠와 같은 모습의 공동체를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보부에서 그런 공동체는 북한의 집단 농장과 비슷함으로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그래서 우리들 50 세대를 남양만에 세워지는 15 마을에 골고루 흩어 배정하였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방침에 따랐으나 시간이 지나보니 전화위복이 되었다.

남양만 간척지에 세워진 15 마을 1200 세대 전체가 한 조직으로 조직화할 수 있었다. 전체를 대상으로 남양만 주민회를 구성하고 요소 요소에 7 개처에 교회를 설립케 되었다. 그 7 교회들은 지금까지 지역 목회를 담당하고 있다. 그 후로 1987년에 서해안 바다가 바라보이는 봉화산에 터를 잡아 첫 번째 두레마을 공동체를 세우게 되었다.

두레마을 세우는 기준은 성경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성령 공동체와 조상들이 이루었던 두레 공동체를 합하고 이스라엘의 키브츠를 참고로 하여 공동체 마을을 세웠다. 그 후로 우여곡절을 거치며 두레마을 운동이 부침을 거듭하며 진행되었다. 2 차례나 여러 사정으로 세워지고 실패하고 거듭하다 내 나이 70이 지나 은퇴하면서 동두천 쇠목골에 두레마을을 다시 시작케 되었다. 30세에 청계천 빈민촌에서 시작하여 40년간 엎치락뒤치락 진행하여 오던 두레공동체 운동의 마지막 작업으로 새 출발한 것이다. 나와 우리 동지들이 바라는 바는 이곳에서 야구로 비유하자면 9회 말 홈런을 치고 마무리 하자는 다짐이다.

두레국제학교 채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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