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효의 세상이아기 [제 2.299회]

이름 : 세종대왕
출생 : 1397년 4월 10일
사망 : 1450년 2월 17일
직업 : 국내 역사인물
경력 : 1443년 훈민정음창제
1441년 측우기제작

세종대왕이 어떤 식견을 가지고 어떻게 조직에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무슨 고민을 했고, 어떤 노력들을 기울였는가를 알아봄으로써 우리는 젝 웰치나 빌 게이츠 같은 서양의 경영자가 아닌 '한국인으로서 한국인을 가장 잘 경영했던 인물’에 대한 모범적 사례를 발견하게 된다.

☆ 시대의 변혁을 꾀한 리더 세종대왕
위대한 인물들은 누구나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불멸하는 추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는 세종대왕이 가슴속에 품었던 의지를 ‘긍정적인(포지티브한) 허무’ 라고 얘기 하고싶다.

그것은 그가 국초 국말의 권력쟁투과 무너져가는 인간사의 허무에서 발견한 것이 다름 아닌 인간 존재에 대한 측은지심이었고, 그것이 다시금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었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세종은 국초에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그의 아버지 태종에 의해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는 것을 보았다. 이로 인해 세종의 심중에는 ‘적극적인 역사 개척보다는 허무에 기반을 둔 인간사와 인생에 대한 연민’이 자리잡게 되었으며, 바로 그것이 그가 역사를 이끌어간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세종의 두 형들은 골치 아픈 왕의 자리에서 도망쳤다.
첫째 형은 미친 척했고, 
둘째 형은 중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세종이 선택한 길은 노자의 도(道)인 ‘대은(大隱)은 어시은(於市隱) : 깊게 은둔하는 것은 시끌벅적한 시장 속에서 세상사람과 동고동락하는 것’ 이라는 가르침이었다.

세종이 평생 실천한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와 무실역행(務實力行: 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써 실행함)은 또 다른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었으며, 말년에 지은 월인천강지곡에는 이러한 세종의 이상이 잘 녹아 있다.

세종은 무엇보다 시대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면밀히 탐색했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뒤 인재 부족으로 인한 국정 공백을 해결하기 위한 인재수급과, 백성들의 새 왕조에 대한 기대에 부응해 민생고를 해결해 주어야만 했다.

세종은 태종의 죽음을 앞두고 이런 시대적 요구사항을 고민하며 준비해 나갔다. “세종은 그 자신의 영달 때문에 권력을 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사하기 위해서였다. 그것도 제대로 행사 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에게는 있었다.

피로 얼룩진 시대를 넘어 태평성대와 최고의 나라를 건설 할 자신이 젊은 세종에게 있었던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는 형님인 효령이 출가하면서 세종에게 남긴 “현세의 미륵이 되어라”는 당부와도 무관하지 않다. 세종은 그러한 시대적 안목과 대의가 있었기에 뜻있는 선비들을 규합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 다스림의 요체는 마음을 닦는 것.
백성과 신하를 다스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마음을 닦는 일 이었다. 과연 그는 어떠한 심법으로 국가를 경영했는가?

‘총명(聰明)하다’는 말에서 총은 ‘귀 밝은 총’ 자 이다.
즉 똑똑하고 현명하다는 것은 자신의 말과 의견을 내세우기 이전에, 남의 얘기를 잘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종을 연구한 한 전문가는 세종의 강점을 이렇게 적고 있다. “군주로서 세종의 생활은 온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기 위해서는 심성훈련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노하지 않아야 하고 끈기가 있어야 한다. 또한 지식과 지혜의 우위가 전제되어야 한다. 진정한 강자만이 약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세종이 황희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 물었다. “두문동에 머물러 있지 뭣 하러 세상에 다시 나왔는가?”

황희는 이렇게 대답한다. “일찍이 진리탐구에 열중 할 뿐 과거에 응할 생각조차 하지 않다가, 백성을 위하여 멸사봉공 하는 것 또한 군자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 일러주신 부친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애초에 황희는 태종의 사람이었고 양녕대군을 옹위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황희의 청렴성에도 불구하고 항상 감시자를 붙여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러나 또 한편, 이 총명한 임금과 충직한 신하가 서로의 마음을 얼마나 잘 알고 서로를 믿었으면, 세종이 황희를 6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케 하고 20여 년을 정승의 자리에 앉힐 수 있었겠는가?

황희는 평생 세종의 정치적인 조력자이자 선생으로 묵묵히 세종을 보필한 신하로 남았다. 또한 세종은 신하들과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할 경우 스스로가 누리는 왕위도 사상누각 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 국가가 안정하게 존속하려면, 충분한 군사력[足兵],  충분한 먹을거리[足食], 그리고 백성의 신임과 마음[民信]을 모두 얻어야 한다고 보았다.

만약 부득이 하게 이들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먼저 군사를 버려야 하고, 다음은 먹는 것을 버리라고 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백성의 신임과 마음임을 강조한다.

세종은 백성들과의 마음의 화합이 더 본질적이요 더 우선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고려조가 망한 원인에 대해 세종은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했기 때문이 아니라, 고려의 왕조가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무너진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세종은 백성들이 자기 곁으로 다가오길 기다리지 않고 그들 곁으로 먼저 다가가고자 노력하는 임금이 되었다. (내일은 2부로 이어집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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