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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를 지킨 인물들 - 박철효의 세상이야기
[제 2.170회]
2018년 01월 11일 (목) 06:26:02 사단법인 독도사랑회 박철효 사무총장

🌊독도를 지킨 인물들🌊 [제 2.170회]

1) 독도 1호주민 최종덕
1980년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다시 주장하고 나오자, " 단 한 명이라도 우리 주민이 독도에 살고 있다는 증거를 남기겠다"며 울릉읍 도동 산 67번지 서도 벼랑어귀에 주민등록을 옮긴 최종덕씨의 독도사랑 정신은 독도를 가본 사람이면 누구나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그는 수중창고를 마련하고 전복수정법, 특수어망을 개발하여 서도 중간 분지에 물골이라는 샘물을 발굴하는 등 초인적 노력을 쏟으며 살다 1987년 생을 마쳤다.

2) 독도 2호주민 조준기
조준기씨는 해병대원으로 울릉도에서 근무한 것이 인연이 돼 최초 독도주민 최종덕씨 딸과 결혼하여 장인 최종덕(1987년 작고)씨의 뒤를 이어 1986년 7월 8일 주소를 독도로 옮겼다.

1994년 생업을 위해 8년여를 거주했던 독도에서 뭍으로 나온 이후 조씨는 노래방을 개업했을 때는 '독도 노래방', 운영하는 식당은 '독도 홍합 돌솥밥'이란 상호를 쓰면서 독도 사진으로 내부를 꾸미는 등 남다른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조씨는 독도를 무인도로 버려둘 수 없다며 독도에서 생활하던 중 아들 강현씨가 태어나자 출생지를 독도로 신고하여, 고향이 독도인 최초의 한국인이자 3대 독도인이 됐다. 딸 한별씨도 독도에 주소를 뒀다.

조씨는 1987년 부터 필자가 운영하는 '독도 사랑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독도사랑 노래 보급, 독도사진전 개최 등 독도사랑을 이어왔고,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민간인 거주만큼 우리땅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없다"며 "독도사랑, 독도지키기가 일회성 운동이 되지 말고 전 국민의 가슴 속에 있어야 일본의 망언에 대처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뼛속까지 독도를 사랑했던 그도 암이라는 큰 암초를 만나 결국 향년 59세로 생을 마감했다.

3) 홍순칠 대장
'독도의용수비대'의 3년 동안의 활약상은 전설 적인 실화로 전해져 내려온다. 53년 울릉도 출신 전역군인들이 상사 출신인 홍순칠 (87년 작고)씨를 대장으로 하여 '우리 시대 마지막 의병'의 기치를 내걸게 된 것은 일본이 한국 전쟁 중 우리 행정력의 공백기를 틈타 독도에 '일본령' 이라는 한자표지를 세웠기 때문이다.

울릉도 주민 '홍순칠'은 울릉도 경찰서장으로 부터 지원 받은 박격포, 중기관총, M1소총 등 빈약한 장비를 갖추고 울릉도의 전역군인들을 이끌고 독도의용 수비대를 결성하여 독도에 주둔했다. 그 후 일본이 3척의 함대를 이끌고 이들을 위협했으나 이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4) 홍재현 참판 일가
홍재현은 조선시대 호조참판을 지내다 울릉도에 유배된 조부를 따라 울릉도에 정착 했다. 그는 독도에 나타난 왜인들을 물리치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고히 밝히고 돌아왔다.

그 후 계속된 일본의 독도 침입은 그의 아들 '홍종욱'이 대를 이어 막아냈으며 손자인 '홍순칠'은 그 유명한 '독도의용수비대' 대장이었다. 홍재현 일가는 3대에 걸쳐 독도를 지켜온 산증인들이었다.

5) 이규원 감찰사
조선시대의 무관. 1882년(고종 19)에 울릉도 검찰사가 되어 울릉도(독도 포함)를 시찰하고 돌아온 이규원은 천혜의 보고인 울릉도와 독도에 왜인들이 침입하여 벌목하고 있으며 자기들의 땅이라고 양 입표까지 한것에 분개하여 일본공사에 항의함은 물론 일본 외무상에 항의문서를 발송 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감동한 고종은 그간의 '공도정책'을 버리고 울릉도 개척에 착수하는 한편 일본정부에 재차 항의하도록 하였다. 조선왕조의 '공도정책'으로 무인도가 되어 있던 울릉도에 현지 조사를 한 결과 일본 어부들이 출어하여 벌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들을 문책하여 돌려 보냈다.

그후, '이규원 울릉도 검찰일기'를 조정에 제출 하여 이를 통해 조정은 일본에 항의 공문을 보내고 울릉도에 주민을 이주 시키도록 조치했다.

6) 신라장군 이사부
신라 지증왕 13년(512년)에 삼국사기에 의하면 배에 나무로 만든 사자를 많이 싣고 우산국 해안에 이르러,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 놓겠다고 위협하는 계책을 써서 우산국 사람들이 그것이 진짜 맹수인줄 알고 항복하였다 한다.

6세기초, 이찬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한(512) 이후 우산국은 신라 뿐 아니라 고려왕조 이후 에도 내륙의 왕조와 조공관계를 맺고 토산물을 바쳐 왔다. 11세기초 동북 여진족의 침략을 받은 뒤 부터 우산국은 급격하게 쇠퇴 하였고 늦어도 12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섬으로 되어 버린것 같다.

7) 울릉도를 지킨 난세의 영웅 안용복
당시는 동래부였던 부산 좌천동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날 좌수영의 능노군(노젖는 사람) 으로 있었다. 그는 당시 부산포에 있던 왜관에 출입하면서 일본말을 배웠다.

1693년 능노군으로 군역을 마친 그는 어민 40여명과 함께 울릉도 부근으로 전복을 따러 나갔다가 거기서 그는 일본의 오타니 가문의 어부들과 부딪쳤다.

당시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오타니에게 '도해면허'를 주어 울릉도와 독도근해의 어로활동을 하게하였다. 안용복은 일본 어부들에게 왜 남의 바다에 와서 고기를 잡느냐고 항의하다가 결국 숫적인 열세에 밀려 일본 오키사마로 납치되고 만다.

18세기 일본사학자 오키시마가 쓴 <죽도고>에 따르면, 당시 안용복은 서른여섯살이었으며, 키가 작고 마마자국이 있는 검은 얼굴 이었다고 한다. 안용복은 오키시마로 끌려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도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땅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는 죄인 신분으로 다시 요나코를 거쳐서 도쿠가와 막부로 끌려가게 된다. 일본측 문헌인 <통항일람>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막부의 조사 에서도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에서 불과 하루 거리이지만, 일본 땅에서는 닷새 거리이므로 분명히 우리 땅'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의 주장에 굴복된 막부는 안용복에게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땅이 아니라는 서계를 건네 주고는 풀어준다. 일본측 자료인 <인부연표>의 당시 기록에는 안용복을 송환 할 때 호송사 2명, 요리사 3명, 병졸 5명을 딸려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송환 도중 나가사키에서 도주에게 서계를 빼앗기고, 다시 대마도에 90일동안 구금되고 만다. 구금에서 풀려나 조선으로 송환된 뒤에도 그는 부산의 왜관에 50일동안 구금된다. 안용복에게 준 서계의 내용을 뜯어고친 대마도주는 안용복을 동래부 동헌으로 넘기면서 항의를 한다.

당시 우리 조정은 울릉도에 농토가 없고 땅이 척박하여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공도정책을 써왔다. 그 틈을 타서 1618년 일본 막부가 오타니 가문에 도해면허를 내준 것이었다.

당시 노론 지배하의 조정은 임진왜란 후 일본국과 국교를 고려하여 안용복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양국간에 불씨를 만든 안용복을 은근히 나무라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장희빈이 축출되고 인현왕후가 복권되면서 소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소론은 노론과는 달리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서계를 보냈다. 이에 대해 일본 막부는 1696년 1월 28일 일본인들의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 대한 도해금지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직접적인 이해 관계에 있는 대마도주는 막부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우리 조정에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이때 안용복이 다시 나섰다. 그는 '울릉우산양도감세관' 이라고 자칭하고, 울릉도로 건너가 일본인들을 내쫓고 그 길로 일본으로 들어갔다.

막부를 찾아가 강력한 항의 끝에 다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땅이 아니다'는 확약을 얻어낸 안용복은 다시 대마도주를 찾아가 항의하여 대마도주로 부터 완전굴복을 얻어낸다. <번례집요>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문헌에서 대마도주는 비로소 울릉도와 독도의 조선영유권을 인정하였다.

현재 독도의 주민으로는 김성도씨 부부가 살고 있습니다. 오늘도 날씨는 무척이나 쌀쌀하지만 '나라사랑! 독도사랑!' 하는 마음으로 무장한 목요일이 되시길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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