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동 800년 은행나무 아래서


[조은뉴스=이정우 객원기자]  팔십 평생, 혹은 아흔을 살아가는 게 우리네 인생이라 본다면, 팔백년을 넘게 살아온 은행나무 아래서 하염없이 작아지는 나를 본 날, 반짝이는 금빛 이파리 속에 한 발짝 들이밀 수 없음이 팔백년 아래 서성이게 만들었다. 작고 예쁜 은행잎들이 석양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 서해바다의 일몰처럼, 낙동강 줄기 어느 물빛의 지느러미짓처럼 황홀하다.


거리를 지나가는 그 누구라도 붙잡고 한 평생 어찌 살아왔냐고 묻는다면 너나없이 우여곡절도 많았고, 세상에 나만큼 힘들게 산 사람도 없을 거라며 막걸리 사발 건네며 해가 저물도록 하고 또 다음날 만나 못다 한 이야기 들려주겠다고 할 사람들이 수두룩할 거다. 세상 모든 일에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나 없으면 세상이 멈춰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외치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장수동 800년 묵은 은행나무 아래 서 있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한 없이 작아지는 곳, 한 없이 작아지다가 잃었던 자아를 찾을 수 있는 곳이 800년 동안 살아온 은행나무 아래가 아닐까 싶다. 석가는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우침을 얻은 것처럼 심오한 인생의 어떤 깨달음은 아니더라도 살아온 날과 살아 갈 날의 지침서를 희미하게나마 발견할 수 있다면 800년 은행나무가 기특하다고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줄 것도 같다.


중국이 원산지인 1과 1속의 오래된 화석식물이다. 열매를 손자 대에나 얻을 수 있다고 해서 '공손수', 잎의 모양이 오리발을 닮았다고 해서 '압각수'라고도 한다. 꽃말은 '장수, 정숙, 장엄함'이다. 고생대부터 빙하기를 거쳐 살아남은 은행나무의 자생지는 중국 양쯔강 하류이지만, 거의 모든 지역에서 심고 가꾼다. 환경오염에 강해 도시의 가로수로 많이 심는다. 재생력이 강하고 화재에도 잘 견디는 은행나무는 오래 사는 나무로도 유명하다.

가을 어느 날, 문득 달려오는 정체모를 그리움, 혹은 서러움이 있다면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800년 은행나무가 너무 멀리 있다면 근처의 산도 좋고, 단풍나무도 좋고, 공원의 고운 이파리들에 마음을 건네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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