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세상이야기] 저녁 6시 이후 '친목'과 '접대'는 '세속종교'인가?

"'저녁 6시 이후'가 선진화돼야 한다"

"대한민국은 '소모임의 박람회장'이다. 한국인의 모임 성격은 딱 두 가지다. 친목모임 아니면 접대모임이다. 친목모임은 과거 지향적이다. 같은 곳에서 태어난 이들의 향우회, 같은 해 태어난 이들끼리의 (동)갑계, 교문을 같이 드나든 사람들의 동문회, 미국 같이 다녀온 직장인들의 찬미회, 시청 총무과를 거친 공무원들의 총우회, 배낭여행에서 만난 젊은이들의 배사랑회…… 등등 우리들의 소모임은 과거 어느 한때의 인연을 매개로 한다. 당연히 주된 활동과 이야기도 미래보다는 과거를 향한다. 접대모임은 안면 터서 청탁하는 것이다. 고위험 사회에서의 '보험' 들기다. 공식적으론 안 되는 일을 사사롭게 해결하는 모임이다. 거의 매일 저녁 접대하고 접대 받는 분들도 부지기수다. 밥 먹고 술 먹고 1차 가고 2차 가고, 노래방 가고 찜질방 가고, 폭탄주 마시고 건배하고…… 공무원이건, 직장인이건, 사업가건, 교수건, 법조인이건, 예술인이건 예외가 없다. 찾아다녀야 할 모임이 너무 많고 만나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 '진짜 일'을 할 시간이 없는 나라가 한국이다."1)

전남 강진 군수 황주홍이 쓴 「'저녁 6시 이후'가 선진화돼야 한다」는 제목의 칼럼이다.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없으리라. 한국에 자영업, 특히 음식점의 수가 많은 데엔 바로 그런 '저녁 6시 이후' 문화가 일조했을 것이다. '저녁 6시 이후'는 앞을 내다본 투자나 보험의 성격이 강해 경제가 어려워지면 좀 뜸해진다. 2008년 상반기에 휴 폐업을 한 음식점이 12만 곳에 이르는 것도 그런 이유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2)

2007년 법인카드 사용액 중 일반음식점 사용액이 5조 1116억 원이었으며, 1조 5904억 원이 룸살롱 같은 호화 유흥업소에서 사용됐다는 건 무엇을 말하겠는가?3) 몇 년 전엔 '룸살롱 이용권'이 경품으로까지 등장한 적도 있다.4) 하기야 전(前)국세청장이 국세청장 시절 뇌물로 받은 돈을 룸살롱 여주인 계좌에 숨기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 아니던가.5)

2008년 7월 취업포털 '커리어'가 직장인 84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발표한 결과를 보면, 직장인들이 한 번 접대할 때 쓰는 평균 비용은 39만 8000원인 것으로 조사됐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52.1%)은 접대를 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고, 주요 접대 방법(복수 응답)으로는 식사(73.1%)와 술(68.6%), 그리고 성(13.6%)과 금품(13.1%) 순이었다. 평균 접대 횟수는 한 달에 한 번(34.4%)이 가장 많았고, 분기에 한 번도 19.2%였다. 접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열에 아홉(89.1%) 꼴로 '필요하다'고 답했고, 계약 성사나 업무 진행에 실제 도움이 된다고 답한 비율도 71.9%에 이르렀다.6)

'국회수첩의 사회학'

접대 전문 직장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전 국민의 접대·친목요원화가 이루어진 지 오래다. 물론 그 매개는 주로 술이다. 연세대 보건대학원 이선미 박사팀이 보건복지가족부 지원으로 실시한 '음주로 인한 사회 경제적 비용' 연구에 따르면 음주로 인한 사회 경제적 비용은 2004년 한 해 20조 990억 원으로 1995년 13조 6230억 원(보건사회연구원), 2000년 14조 9352억 원(연세대 보건대학원)에 비해 크게 늘었다. 우리나라의 음주 손실비용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약 2.9% 수준에 해당하며, 캐나다(1.09%)·프랑스(1.42%)·스코틀랜드(1.19%) 등 주요 선진국들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치였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9년에서 2003년까지 전체 음주인구 비율은 64%대로 일정하게 유지된 반면 음주인구 중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술을 마시는 '과음 인구'는 28.8%에서 43.6%까지 급증했다.7)

2006년엔 한국형 접대 문화를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까지 나왔다. 기업 홍보 담당자가 업무상 술자리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다쳤다면 업무상 재해가 인정된다는 판결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업무상 술자리' 시한을 밤 12시까지로 본 1심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언론사 홍보를 담당하는 원고 입장에서 업무 특성상 시간이 늦었다고 해서 접대 자리를 끝내기가 곤란했을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감안하면 새벽 4시를 넘어서까지 한 술자리는 접대업무가 계속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8)

접대는 '을'만 하는 게 아니라 '갑'도 한다. 야망을 가진 이들은 무엇보다도 접대에 능해야 한다. 찾아다녀야 할 모임이 너무 많고 만나야 할 사람이 너무 많은 사람이 리더가 되고 존경도 누린다. 한국인들 중엔 경조사 때 찾아오는 손님 수로 인생을 평가하려는 이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인생의 본질은 '인맥 만들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여기서 '친목'과 '접대'는 '인맥 만들기'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하나로 합류한다.

한국의 '국회수첩'도 그걸 잘 보여주고 있다. '국회수첩의 사회학'을 생각해본 사람이 얼마나 되랴. 용하게도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 이하원이 그걸 시도했다. 그는 "18대 국회의원 299명의 이력을 소개하고 있는 이 수첩엔 각 의원들의 출생 연도와 출신 대학이 맨 앞에 기록돼 있다. 누구나 알 만한 명문고를 졸업한 일부 선량(選良)들은 7줄짜리 자기 소개란에 출신 고등학교 이름까지 집어넣었다. ' 중 고'라는 약칭으로 중학교 이름까지 거론한 의원도 있었다. 박사학위를 가진 한나라당 K의원은 자신의 이력 중 80%를 출신 학교로 채웠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원들이 사회에서 어떤 경력을 쌓았는지보다 20년, 30년 전에 어떤 대학을 졸업했는지가 부각되는 관행은 여전했다. 국회 사무처가 발간한 국회수첩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통용되는 학력과 과거 중심의 문화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가 어떤 학교를 졸업했는지가 여전히 중요하다. 그렇기에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Y고 인맥 부상, K대 출신 중용' 등의 기사가 종종 회자된다. 이에 비해 학력과 관련한 미국의 문화는 정반대다. 워싱턴 DC의 싱크탱크에서 개최되는 세미나에 가면 연사(演士)에 대한 한 장짜리 소개서가 배포된다. 기자는 숱한 행사를 취재하면서 이들을 소개하는 자료에 수십 년 전에 졸업한 대학이 먼저 나오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출신 고교가 소개된 자료는 물론 없었다. …… 출신 대학이 아예 언급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 일반적인 미국인들의 이력서도 가장 최근의 경력에서 시작해서 학력이 마지막에 언급되는 것이 관행이다. 이는 수십 년 전에 어떤 대학을 졸업했느냐가 한국보다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음을 의미한다."9)

"오늘 만날 경쟁사 사장 인맥 알아볼까?"

과거 지향적 인맥은 한국 사회의 철칙이다. 대통령들을 보라. 이들은 자기 인맥 챙기기에 있어서 극치를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그게 그들이 그 자리에까지 오른 성공의 비결이었는데 그걸 어떻게 바꿀 수 있으랴. 정권교체 이후 벌어진 모든 싸움이 인맥 싸움이었고, 그 다음엔 정권 내부의 인맥 싸움이 벌어진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걸 잘 아는 기자들은 인물 소개 기사를 쓸 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높게 평가하는 게 '폭넓은 인맥 마당발'이다.

"오늘 만날 경쟁사 사장 인맥 알아볼까?"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런 제목으로 시작한 『중앙일보』의 '조인스 인물정보' 홍보 기사 내용이 재미있다. 이 기사는 인맥의 위대성에 대한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중견 건설사에 근무하는 김모 과장은 요즘 사내에서 칭찬이 자자하다. 경쟁사를 물리치고 어려운 수주를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가 수주에 성공한 것은 관련 인맥에 대한 정보수집에서 경쟁사에 앞섰기 때문이다. 김 과장은 경쟁사는 물론 발주사의 전략과 관련 인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면밀히 분석하는 등 준비를 철저히 했던 것이다. 그는 특히 그중에서도 발주사에 대한 정보를 얻는 데 주위의 인맥을 잘 활용했다. 그가 핵심 인물에 대한 정보를 얻기까지는 '인맥관계도'가 중요한 포인트였다. 고객의 기본정보만을 알고 있었던 김 과장은 인터넷의 인맥관계도 서비스를 활용해 그 사람의 주변 인물에 대한 정보를 확보했다.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 중에 김 과장과 친밀한 사람을 찾아 해당 고객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획득하게 됐고, 이것이 결국 수주 성공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요즘 효율적인 인맥관리가 화두가 되고 있다. 비즈니스에서 인맥은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고 있고, 개인의 여가생활에도 인맥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어 이 기사는 "국내 최고 최대의 데이터를 가지고 인물정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조인스 인물정보'는 국내 30만 주요 인사의 인맥정보를 한눈에 보여주는 '인맥관계도' 서비스를 9월 초 오픈하고 최근 서비스를 한층 업그레이드 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맥관계도' 서비스란 조인스 인물정보에서 보유하고 있는 인물들의 출생지, 가족, 주요 학력 및 경력 등의 정보를 점수화해 특정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인맥 연관을 지도로 보여주는 서비스다. 최근 완료된 업그레이드에서는 인맥관계도 화면을 전체 화면에서 볼 수 있게 만들어 몇 번 누르면 꽉 찼던 기존의 작은 화면이 시원하게 바뀌었다. 또 전체 화면에서 검색 영역을 별도로 확보함으로써 페이지 이동을 하지 않고도 바로바로 필요한 인맥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했다. 인맥점수의 폭을 좀 더 넓힘으로써 고객에 대한 보다 많은 정보를 보여주는 것 역시 이번 업그레이드의 주요 기능 중 하나다. 인맥관계도 업그레이드 오픈을 맞이해 조인스 인물정보는 이달 말까지 무료로 인맥관계도를 사용할 수 있고, 추첨을 통해 사은품도 증정하는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인맥관계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조인스 인물정보에 접속한 후 인물을 검색해 검색 결과 리스트 우측에 있는 인맥관계도 버튼을 클릭하면 된다."10)

이런 서비스에 대해 칭찬을 해야지 시비를 걸면 안 된다. 왜냐하면 국민의 절대 다수가 이미 '인맥'을 '정당한 능력'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게 믿는 것인지 아니면 '체념과 순응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몰라도, 여러 설문조사 결과들은 인맥을 거리낌 없이 내세워도 좋을 만한 것으로 여기는 세태를 말해주고 있다. 개그맨들이 방송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인맥을 공공연히 밝히거나 과시하는 것도 바로 그런 세태의 반영이리라.

인맥 문화의 딜레마

만인이 인정하겠지만, 한국은 명실상부한 '접대 공화국'이다. '접대 경제'의 규모가 너무 커져 '접대 규제'는 민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주고받는 접대 속에 인정이 싹트고 명랑사회가 구현될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부정부패가 꽃을 피울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갈수록 포장술이 세련되어져 '인맥'이니 '인적 네트워크'니 하는 고상한 합법적 메커니즘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른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Networking Service)'가 디지털 인맥 구축의 총아로 떠오르고 있다지만,11) 온라인 인맥 문화가 기존 오프라인 인맥 문화의 근본을 바꿀 것 같진 않다.

인맥 만들기엔 그만한 보상이 뒤따르지만, 흥미로운 건 인맥 만들기가 그런 이해관계의 게임으로만 이해되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국인들은 덕(德)과 정(情)을 추가해 인맥을 사람 됨됨이의 문제로 격상시킨다. 삶의 보람이나 의미까지 덤으로 주어지기도 한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황주홍이 소망한 '저녁 6시 이후'의 선진화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딜레마다. 인맥 없인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현실이 말이다. 진보적인 운동마저도 인맥 장사가 필수다. 시민운동의 경우도 시민단체라는 '제도적 신뢰'에 근거해 자발적으로 가입한 회원들은 대부분 참여도가 낮으며 적극 활동하는 회원들은 기존 회원의 학연과 지연 등 연고에 의해 동원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12) 한국민속문화연구소장 주강현은 이렇게 된 이유의 일부를 '지정학'에서 찾았다.

"한국 사회는 '섬'이다. 남한 사회에서 외국을 나가려면 반드시 비행기나 배를 타야 한다. 절반이 휴전선에 막혀 있는 이상 결코 대륙에 딸린 한반도가 아니라 섬나라일 뿐이다. 인맥 지연 따위로 얽혀진 섬답게 늘 작은 일로 분노하고 흥분하고 들끓는다. 세계 어느 곳에서건 섬나라는 쏠림이 강하다. 한반도라는 통일적 대륙적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나,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섬으로 살아왔다는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13)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진화론

황주홍은 '저녁 6시 이후'의 문화가 나라를 망칠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선진화되기 어려울 것이고 더 큰 희망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 나 역시 이 수준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이상의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보는 편이다. 최근의 '쌀 직불금' 파동이 잘 보여주는 바와 같이, 무자비한 약육강식(弱肉强食) 문화가 인맥 만들기 문화와 손에 손을 잡고 같이 나아가리라는 전망이다.

한국인들은 내 인맥에 속한 사람에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해주지만, 그 밖의 사람과 일들에 대해선 공적 책임감이 박약한 사람들이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결되는 사모임·사조직 관리와 육성엔 혼신의 힘을 다 바치는 건 물론 국민 세금까지 마구 퍼부어주는 일이 우리 주변의 익숙한 풍경이 된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쌀 직불금' 파동의 원인도 바로 이런 풍토에 있다.

한국에서 이른바 사회진화론은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양식 있는 지식인치고 사회진화론을 비판하지 않는 이가 없지만, 사회진화론은 흘러간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현 한국 사회의 최고 지배 이데올로기다. '동물의 왕국'에서 동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안전을 꾀하듯이, 우리는 인맥으로 그런 안전망을 구축한다. 그러나 자존심은 있어서 인맥에 고상한 의미 부여를 하는 데에 게으르지 않다. 세상이 살벌하고 무섭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인맥에 집착하게 되고, 그 인맥의 울타리에서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긍지를 보호받으려고 한다.

그런 시각에서 보자면, 한국의 '저녁 6시 이후' 문화는 음주 자영업을 하는 이들의 복리후생을 위해서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모두 다 미치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저녁 6시 이후'에 예배를 드리는 '세속 종교'의 지위에까지 올랐다고 보아야 하는 건 아닐까? 오늘 '저녁 6시 이후'의 예배를 기다리는 분들의 건투를 빈다./대자보<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12월호에 실렸습니다.>

I am the Alpha and the Omega, the First and the Last, the Beginning and the End.(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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