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3부에서 이어집니다.)
● 압박에 항거하여아인슈타인의 마음 
밑바탕에는 세상을 멀리하고 혼자 있고 싶은 심정과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책임감이 늘 공존 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위협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나 강력히 그에 항의하곤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얼마 후에, 독일의 학자들과 작가들이 호전적인 선언을 발표했을 때 아인슈타인은 즉각 다른 평화주의자들과 함께 반대 성명을 내었다. 대전 후 여러국민의 상호 이해를 더할 목적으로 국제연맹 산하에 지적협력위원회가 만들어졌을 때에는 위원의 한사람으로서 열심히 노력하였다,

이 무렵 아인슈타인은 유태인 문제를 위해서도 헌신적인 노력을 시각하였다. 그는 유태인의 가정에 태어났지만, 타고난 자유를 숭상하는 정신 때문에 유태교의 계율과 유태인 사회의 전통적인 습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에서는, 패전의 원인이 유태인의 음모라는 유언비어가 전파되어 유태인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아인슈타인은 유태인 압박의 부당함을 끈질기게 호소하였으며, 1921년에는 유태민족 주의의 지도자 와이즈만(C. Weizmann)과 함께 유태인 구제 기금을 모금하기 의하여 미국에서 강연 여행을 하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이와 같은 아인슈타인의 사회활동은, 그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의 적의를 불러일으켰다. 

1920년경 부터 반 유태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이 시작되었다. 나중에는 상대성 이론까지도 아인슈타인이 수립했다는 이유로 유태적인 사이비 과학이라고 몰아붙이기에 이르렀다. 아인슈타인의 평화주의도 공격의 과녁이 되었다. 그가 1925년에 의무적인 병역에 반대하는 성명에 서명했다는 사실은 아인슈타인을 적시하는 사람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 무렵 아인슈타인은 암살을 염려 해야만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굽히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1933. 1월에 히틀러(A.Hiller) 가 정권을 잡자 군국주의와 반 유태주의는 한층 더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여 많은 유태인 과학자는 연달아 추방되고, 국외로 망명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은 그 전 해에, 초청을 받아 미국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다시 독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는 "개인이 법 앞에서 평등히 다루어지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가르칠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나라에서 살기를 원치 않는다"라고 항의하고, 베를린의 아카데미로 사표를 보내버렸다. 히틀러의 정부는 아인슈타인 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그에게 5만 마르크의 현상금을 걸었다. 

● 미국에서의 생활
독일에서 추방된 아인슈타인을 따뜻하게 맞아들인 곳은, 미국의 프린스턴에 새로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되는 고급 연구소였다. 아인슈타인은 여기의 종신 연구원으로서 오로지 연구에 전념하게 되었다.  프린스턴 거리의 조용한 환경과 연구소의 차분한 분위기는 아인슈타인의 마음을 깊이 위로해 주었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1929년경부터 시작하고 있었던 통일장이론을 다시 시작하였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중력을 공간의 성질로 설명한 이론이라 할 수 있는데, 전자기장의 이론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이 전자장을 중력과 똑같이 공간의 성질로서 통일적인 이론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 통일장 이론의 연구이다. 아인슈타인은 죽을 때까지 끈기있게 연구를 계속하여, 죽음 직전에는 커다란 자신을 가진 이론을 완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진정한 해결에는 아직 먼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 인류를 파멸에서 구하기 위하여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우라늄의 핵분열이 발견 되었다. 이 뉴스를 들은 아인슈타인은, 만약 나치스 독일이 이것을 무기로 이용하는 데 성공한다면 어떤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것을 막는 단 하나의 방법은 '연합국 에서도 원자 폭탄의 가능성을 미리 연구해 두는 일이다'라고 생각한 아인슈타인은 루즈벨트(F.D. Roosevelt)대통령에케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채택되어 미국의 원폭 제조계획이 추진 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착실히 진전되어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직전에는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에게는 생각 밖의 일이었다. 나치스가 원자폭탄을 갖는 것을 막는 것만을 염원하고 있었는데, 미국의 손 으로 원자폭탄을 인간 위에 던지다니! 깊이 책임을 느낀 아인슈타인은 원자 무기를 없애기 위하여 생애의 마지막 날까지 끈질긴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날로 격심해져 가는 핵무기 경쟁을 우려하고, '아인슈타인이 죽음의 직전에 영국의 철학자 러셀 (B.A.W Russell)과 의논해서 발표한 성명에는 세계 각국의 저명한 과학자 11명이 서명했으며,  전쟁 회피를 위하여 각국의 과학자가 의견을 교환 하는 모임인<패그워시회의>의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까지 위대한 과학자인 동시에 인류의 운명 에 깊은 관심을 계속 품고 있던 아인슈타인은  1955년 4월 18일에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명절 연휴를 가족과 함께 즐겁게 보내셨지요? 재충전하여 일상생활로 돌아온 오늘도 힘차게 출발하는 화요일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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