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효의 세상이야기 [제 2.485회]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을 치다. 상대방을 교묘하게 속여 공략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중국의 고대 병법인 《삼십육계비본병법(三十六計秘本兵法)》의 6번째 계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용병의 도는 부드러운 것으로 적에게 보여 주고 강함으로 맞이하며, 약한 것으로 보여 주고 강함을 타며, 움츠리는 것처럼 했다가 펴는 것으로 대응하며, 서쪽을 도모하려면 동쪽으로써 보여 준다.」

동쪽을 치겠다고 소리를 내는 것은 사실은 서쪽을 치는 것이다.(聲言擊東, 其實擊西.) 두우(杜佑) 통전(通典) 병육(兵六)

‘성동격서’의 대표적인 예로는 조조(曹操)가 1만 명의 군대로 원소(袁紹)의 10만 대군을 격파한 관도(官渡)의 전투를 들 수 있다. 조조와 원소는 젊은 시절부터 경쟁을 했던, 숙명의 라이벌이라 고도 할 수 있는 인연이었다. 

원소는 증조부 원안(袁安)이 사도(司徒)가 된 후 4대에 걸쳐 삼공(三公)을 배출한 최고 명문가에서 태어난 귀공자였다. 원소의 가문 만큼은 아니지만, 조조 역시 표면상으로는 권문세가의 자제였다. 

환관이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후한(後漢)의 환제 (桓帝) 시대 환관의 최고 관직인 중상시(中常侍) 였던 조등(曹騰)이 조조의 아버지 조숭(曹嵩)을 양자로 들인 덕분이었다. 조조의 집안은 원래 하후(夏候)씨였으나 이로 인해 조(曹)씨 성을 가지게 되었다. 

사진출처 : KBS2 인물 삼국지 [25부] 미련한 겁쟁이, 원소
사진출처 : KBS2 인물 삼국지 [25부] 미련한 겁쟁이, 원소

조조나 원소는 모두 젊은 시절부터 비교적 탄탄한 정치적 경험을 쌓았다. 원소는 20세에 복양(澲陽) 현장(縣長)으로 재임하면서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조조도 20세에 효렴(孝廉)에 추천되어 관계에 진출한 후 유능한 관리로 활약했다. 

당시 조조는 낙양북부위(洛陽北部尉)로 임명되어 엄격한 법 시행으로 낙양의 치안을 바로 잡았다. 30세 때 제남국(濟南國)의 상(相)으로 승진한 조조는 뇌물이 횡행하고 독직 사건이 빈번했던 영내의 관료 8할을 면직시켰고, 백성을 괴롭히는 제사를 엄금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했다.

후한의 제12대 황제인 영제(靈帝)가 죽자, 대장군 하진(何進)과 원소는 궁정 내의 환관을 일소 할 계획을 세우고 동탁(董卓) 등 지방의 힘 있는 무장들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그 계획이 누설되는 바람에 하진은 동탁이 도착하기 전에 환관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환관과 외척의 싸움에서 일단 환관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궁중이 혼란에 빠지자 원소는 그 틈을 타 환관을 모두 살해해 버렸다.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동탁은 상경하자마자 소제(少帝)를 폐하고 진류왕(陳留王)을 황제로 세웠으니, 이 사람이 바로 후한 마지막 황제인 헌제(獻帝)다.

원소는 겉으로는 동탁에게 복종하는 척 하다가 기회를 틈타 기주(冀州)로 도망하여 동탁 토벌 동맹군을 결성한다. 조조 역시 진류(陳留)로 돌아가, 가재(家財)를 흩어 군사를 일으켰다. 

이처럼 각처에서 일어난 군웅들이 모여 반동탁군 인 관동군(關東軍)을 결성하고 그 맹주로 원소를, 분무장군(奮武將軍)으로 조조를 추대했다. 하지만 군벌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고, 조조 혼자 동탁군과 맞서 고군분투하다가 군대는 대패하고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원소는 동탁을 칠 생각보다는 따로 황제를 세운 후에 상황을 봐서 자신이 자리를 대신 할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군벌들의 서로 다른 속셈 때문에 이 동맹군의 활동은 지속되지 못했다. 

한편, 농서(隴西) 출신으로 농서 쪽에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던 동탁은 낙양에 있는 것 보다는 농서에 가까운 장안(長安)에 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하에 헌제를 모시고 장안으로 돌아갔다. 동탁은 낙양을 떠나면서 낙양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고 수백만의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사도 왕윤(王允)이 동탁과 여포(呂布)의 사이를 갈라놓은 후, 여포가 동탁을 살해하자 중앙 권력의 공백 상태가 생기게 되었고, 이 공백 상태를 자연스럽게 메운 것이 조조였다. 

조조는 건안(建安) 원년(196) 헌제의 부름으로 낙양에 입성하여 “천자를 옆에 끼고 제후를 호령 하는(挾天子以令諸侯)” 중앙의 실질적인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같은 해, 조조는 낙양이 황폐해졌다는 이유로 헌제를 받들고 자기의 새로운 근거지인 허창(許昌)으로 천도하고 대장군(大將軍)이 된다. 

조조는 헌제를 조종하여 원소를 태위에 임명하고 (원소는 이 직책을 거부했고, 조조는 다시 대장군 의 직위를 원소에게 양보한다), 손권(孫權)을 파로장군(破虜將軍)으로 봉하고 회계태수(會稽太守)를 겸직하도록 하는 등,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면서 급속하게 그 세력을 확장시켜 갔다.

건안 2년(197) 봄, 원술(袁術)이 수춘(壽春) 에서 황제를 칭했다. 조조는 즉시 “천자의 명을 받들어 신하 되기를 거부하는 자에게 호령한다 (奉天子以令不臣)”라는 명분으로 원술을 쳐 멸망시킨 후, 연이어 여포를 멸하고 장양(張楊) 의 내분을 이용하여 하내(河內)를 손에 넣었다. 

이리하여 조조의 세력은 서쪽으로는 관중(關中), 동쪽으로는 연주(兗州), 예주(豫州), 서주(徐州)에 까지 미치게 되어 황하 이남과 회수(淮水), 한수(漢水) 이북의 광활한 땅을 가지게 되었다.

내일은 성동격서 2부로 이어집니다. 오늘도 남을 교묘히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활용하는 슬기로운 성동격서의 장을 만드시길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저작권자 © 인터넷조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