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효의 세상이야기 [제 2.482회]  

복소지란(復巢之卵)은 공융의 어린아들과 딸이 한 말이다. "둥지가 부서지면 알이 성할리가 없다"는 뜻이다. 

공융이 조조의 노여움을 사 끌려가자 그의 비복들이 그 두 자제에게 몸을 피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둘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복소지하 안유완란(復巢之下 安有完卵)이라고 말했다.

공융과 조조의 인연은 상극이었다. 공융은 조조의 잘못을 꾸짖고 조조는 훗날 공융을 죽였다. 뿐만 아니라 공용의 어린 자식들도 죽였다. 공융이 조조와 잘 지냈거나 아니면 피 할 수 있었다면 자신과 자녀들이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융(孔融 153년~208년)은 후한 말의 정치가이며 유학자로 공자의 20세 손이다. 자는 문거(文擧)이며 예주(豫州) 노국(魯國) 곡부현(曲阜縣) 사람이다.

헌제(獻帝) 때 북해상(北海相)으로 있으면서 중학교를 세워 유학(儒學)을 전파하고 발전시켰으며 뒤에 조조(曹操)에게 살해되었다.
어릴 적에 당대 최고의 명사인 이응(李膺)의 앞에서 태중대부(太中大夫) 진휘(陳煒)를 농락하여 인정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7대조 공패(孔覇)는 원제(元帝)의 스승이 된 후 시중으로 승진했다. 고조부인 공상(孔尙)은 거록태수를 역임했다. 아버지 공주(孔宙)는 태산도위를 역임했고, 공융은 아버지 공주의 7형제 중 6째 아들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자유분방하였고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그는 10살에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서 낙양에 올라갔다. 당시에 하남윤(河南尹)이었던 이응(李膺)은 명성이 높았으며 그의 문하에는 많은 빈객들이 드나들었다. 

그러나 당대의 영웅이나 현자 또는 가문과 통했던 사람들의 자손은 없었다. 10여세의 공융은 이응이라는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싶어서 이응의 문도가 되려고 했다. 이응의 집에 도착한 공융은 문지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군(李君)의 가문과 통했던 사람의 자손이다!”라고 하자 이응이 공융을 만나서 이렇게 물었다. “고명하신 조상님께서 일찍이 나와 교제를 하신 적이 있는가?” 그러자 공융이 말하길 “그렇습니다! 저의 선군이신 공자와 군의 조상이신 이노군(李老君))께서는 덕과 의를 나란히 하셨으며 함께 사우로 지내셨습니다! 그러니 저 공융과 군은 대대로 통하는 집안이었습니다!” 

어린 공융의 말에 좌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기이한 동자라고 했다. 태중대부 진위(陳煒)가 나중에 방문하자 좌중에 있던 사람이 동자의 발언을 알렸더니 진위는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영리하다고 커서까지 반드시 그렇겠는가!” 라고 묵살하였다. 그러자 공융은 이렇게 대답했다. “말씀을 듣고 보니 군께서도 어렸을 때 총명했겠습니다!” 이응은 크게 웃으며 그가 고명하고 장대하니 반드시 큰 그릇이 될 것이라며 칭찬하였다.

공융은 13세에 부친이 죽자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을 상하게 되어 간신히 부축을 받은 후에야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의 효성을 칭찬했다. 성품이 배우는 것을 좋아하여 여러 가지 학문을 두루 섭렵했다.

공융은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으로 좌중엔 손님이 가득차고 술잔에는 술이 비지 않았다. 십상시(十常侍)의 전횡을 비판한 청의파 선비로 유명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노식(盧植)의 부장으로 활약했다. 동탁(董卓)이 권력을 잡자 그의 포악함을 비판하다 북해의 상(相)으로 전출되었다. 당시 북해는 20만을 넘는 기주 황건적의 침입으로 크게 피폐해 졌다. 

공융은 황건적을 몰아냄과 동시에 영내에 학교를 세우고 도덕성의 회복을 장려하는 등 통치에 힘썼다. 193년 초평 4년 공융은 도창(都昌)에 주둔하다 황건적의 잔당인 관해(管亥)의 습격을 받고 포위되어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유비(劉備)와 태사자(太史慈) 등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이후 도겸(陶謙)이 죽자 표를 올려 유비를 서주자사로 천거했다.

이후 공융은 원담(袁譚)과 거듭 싸움을 벌인 끝에 패하여 영지를 빼앗기고 처자식 까지 모조리 붙잡힌 채로 도망쳤다. 그런데 마침 황제의 부름을 받았으므로 '허(許)'로 가서 장작대장(將作大匠), 소부(少府)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공융은 당시 황제를 옹립하며 점차 야심을 드러내고 있던 조조(曹操)와 자주 대립했다. 거듭 글을 올려 조조의 정치를 비판하며 망신을 주었다. 조조 역시 공융을 증오하며 꺼렸으나 워낙 공융의 명망이 높았으므로 겉으로는 용인하는 척 했다.

208년 건안 13년 조조의 형주 정벌에 분개하여 조조를 비판했다. 그러나 조조의 명령으로 처형 당하고 가족은 몰살당하였다. 당시 공융에게는 7세 된 딸과 9세 된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 공융이 잡혀가던 날 그들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아버지가 잡혀가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꼼짝하지 않고 묵묵히 바둑을 두었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큰 일이 날 것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빨리 도망가도록 말했다. 

그러나 공융의 딸은 매우 침착하게 오빠와 바둑을 두며 죽음을 기다렸다. “새집이 부서졌는데 어찌 알이 깨지지 않겠는가(安有巢毁而卵不破乎).”

후에 이 일을 보고 받은 조조는 공융의 아이들을 잡아오도록 하였다. 공융의 딸은 자신들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보고도 겁내지 않고 의연하였다. “죽은 뒤에도 혼령이 있어서 우리들이 부모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이 어찌 가장 즐거운 일이 아닌가!” 

어린 소녀의 담담함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공융의 어린 딸은 말을 마치자 고개를 들고 참형 당했다.

오늘도 국가와 직장, 그리고 가정을 위하여 복소지란을 가슴에 품고 웅비하는 지혜로운 화요일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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