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효의 세상이야기 [제 2.469회]  

칼 한 자루를 들고 모임(위험한 자리)에 나간다. 
칼 한 자루만 들고 위험한 자리에 나가는 대담함을 보여주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單刀俱會(단도구회) 와 유사함.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오(吳)나라 손권(孫權 : 吳太祖 大皇帝, 182년 - 252년)의 참모인 오(吳) 나라의 노숙(魯肅 : 172년 - 217년)과 촉(蜀)나라 의 무장 관우(關羽 : 蜀나라 武將, 武聖, 160년? - 219년)는 양 진영에서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이들의 만남은 ‘단도부회(單刀赴會)’의 인연으로 유명하다. ‘단도부회(單刀赴會)’는 칼 한 자루를 들고 모임에 나간다는 뜻으로, 마음 편히 나가는 모임이 아니라 생사를 결정짓는 위험한 자리의 모임을 말한다.

노숙(魯肅)은 관우(關羽)를 초청하여 담판을 지어 여차하면 죽이겠다는 잔치를 열었다. 이에 관우는 청룡도 한 자루만 들고 찾아가는 대범함을 보였다.

‘단도부회(單刀赴會)’의 인연을 가진 노숙(魯肅)과 관우(關羽)는 직접적으로 서로를 죽이는 일이 없는 비교적 상생의 인연이었다. 그러나 단도부회 이후 노숙과 관우를 둘러싸고 있던 양 진영의 상황은 두 사람을 상극으로 몰고 갔다.

사진출처 : 나무위키 형주의 초거대 군신 관우 동상
사진출처 : 나무위키 형주의 초거대 군신 관우 동상

적벽대전 이후 유비(劉備 : 蜀漢 初代 皇帝, 161-223, 在位 221∼223)가 익주(益州)를 통치하게 되자 '오(吳)'와 '촉(蜀)' 사이에 무릉(武陵),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陽)등 사군의 귀속이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오(吳)'에서는 사군은 유비에게 빌려준 땅으로, 유비가 공안(公安)에 본거지를 둘 무렵 영지가 좁다고 하여 사군을 빌려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유비가 넓은 익주(益州)를 통치하게 되었으니 사군을 돌려 받는게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유비는 당시 영지가 좁아서 미리 양해를 구한 후에 사군을 빌린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215년 손권(孫權)은 제갈량(諸葛亮 : 181년 - 234년)의 형인 제갈근(諸葛瑾 : 吳나라 大臣, 174년 ~ 241년)을 사신으로 보냈다.

유비가 서천(西川)을 장악하자 손권은 형주(荊州)를 반환 받고자 했다. 장소(張昭 : 吳나라 文官, 156년 - 236년)가 계책을 내었다.
제갈근(諸葛瑾)의 가족을 거짓으로 옥에 가두고 제갈근(諸葛瑾)을 서천(西川)에 보내 제갈량(諸葛亮)을 설득한다는 것이다. 

유비는 양주(涼州)를 평정한 후에 주겠다고 했다. 형인 제갈근의 가족이 옥에 갇혀 있다는 말을 들은 제갈량은 울면서 유비에게 애원했다.

유비는 형주의 일부인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陽)의 삼군을 주겠다고 했으나 관우는 돌려주지 못하겠다고 했다. 

손권(孫權)은 '촉(蜀)'의 확실한 대답이 있기도 전에 삼군에 관리들을 부임시켰으나 삼군을 지키던 관우는 '오(吳)'의 관리들을 내쫓았다. 장소(張昭)의 계책은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손권(孫權)은 더 이상 참지 않고 여몽(呂蒙) 에게 2만의 군대를 주어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陽)으로 보냈고, 노숙(魯肅)에게는 후방 파구(巴丘)에 진을 치게 했다. 

유비도 강력히 대치했다. 3만의 군대를 이끈 관우가 동정호(洞庭湖) 남쪽의 익양(益阳)에 포진케 하고 유비 자신도 익주에서 양자강(揚子江) 남쪽의 공안(公安)으로 들어갔다. 

손권은 관우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고 판단하고 삼군에 주둔하고 있던 여몽(呂蒙)을 파구(巴丘)로 이동시켜 병력을 한 곳에 모았다. 쌍방의 군대가 집결한 익양(益陽)과 파구(巴丘)는 장사(長沙)를 끼고 동서로 35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양 진영의 관우와 노숙은 가능한 전쟁을 피하려고 했다. 노숙은 삼분지계 전략에 따라 유비와 연대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관우 또한 손권과의 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제갈량의 전략을 따르고 있었다. 노숙과 관우, 두 사람은 주군의 뜻에 따라 대치하고 있지만 싸우게 되면 조조에게만 이득이 될 것이라는 공동의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의 문제를 풀기 위해 노숙이 먼저 움직였다. 육구(陸口)에서 잔치를 열고 관우를 초청한 후 설득하여 듣지 않으면 도부수(刀斧手) 를 시켜 죽이고 만약 관우가 오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켜 형주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관우는 관평(關平)과 마량(馬良)이 저지함에도 불구하고 노숙의 초청에 응했다. 청룡도 한 자루만 들고 잔치에 간 것이다. 노숙이 관우를 영접해 상면한 자리에서 형주를 돌려달라고 했다. 

관우는 적벽대전에서 유비가 싸운 합당한 대가 라고 하고, 노숙은 동오(東吳)야말로 장판교(長坂橋)에서 패한 유비를 구해준 은인이라고 했다.

“당시 유비가 싸움에서 패한 처지를 동정해서 형주를 빌려 주었던 것이다. 지금 유비가 익주를 손에 넣었으니 이제는 형주를 반환해야 한다. 전부가아니면 삼군만이라도 돌려달라고 양보했는 데도 이행하지 않고 있다.”며 관우를 몰아 붙였다. 

노숙의 말에 관우는 땅은 덕이 있는 자가 차지 해야 하는 법이고 원래 누구의 것이라고 정해진 것이 아니라고 했다. 순간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관우는 취한 척하며 한 손으로 청룡도를 쥐고 한 손으로 노숙을 끌고 강가로 갔다. 

'오(吳)'의 여몽(呂蒙)과 감녕(甘寧)은 노숙이 다칠까봐 도부수를 움직이지 못했다. 관우는 준비한 배를 타고 돌아올 수 있었다.

노숙과 관우의 만남은 양측 진영에 아무런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노숙은 그로부터 2년 후인 217년에 46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형주의 사군 귀속문제는 노숙과 관우의 단도부회(單刀赴會) 만남 이후 조조(曹操 : 曹魏 太祖 武皇帝, 155년 - 220년)가 한중(漢中) 을 침공하면서 해결되었다.

유비가 형주를 고집하면 익주가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었다. 유비는 익주로 돌아가기 위해 손권과 동맹을 맺고 삼군을 반환 할 수 밖에 없었다.

※ 참고 : 三國志(삼국지) 第54卷 吳書(오서) 周瑜魯肅呂蒙傳(주유노숙여몽전) ‘魯肅(노숙편)’

오늘은 동물들이 겨울잠을 자러간다는 '입동' 입니다. '단도부회'의 정신으로 매사를 지혜와 슬기로 무장하는 수요일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저작권자 © 인터넷조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