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54회]  

"강한 쇠뇌로 쏜 화살의 끝" 
'강하게 날아가던 화살도 마지막에는 힘이 떨어져 맥을 못 쓰듯 강하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힘을 잃고 쇠약해 진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북방의 이민족인 흉노(匈奴)는 중원의 한족(漢族) 에게 영원한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춘추시대 부터 흉노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각 나라마다 성을 쌓았고,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제는 만리장성을 축조했다. 

한(漢)나라 때에 와서는 흉노와 화친정책을 채택 하다가 한무제(漢武帝, 재위 BC140∼BC87)가 강공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한무제 때에 조정에서 는 대흉노 강공에 대한 논의가 슬슬 머리를들기 시작했는데, 강공파의 대표적인 사람은 왕회(王恢)였고 화친파의 대표적인 사람은 한안국(韓安國)이었다. 

사진출처 : 서울시립 동대문노인종합복지관 카페
사진출처 : 서울시립 동대문노인종합복지관 카페

한무제가 아직 강공책을 쓰기 전의 일이다. 언젠가 흉노들이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제의해 왔는데, 왕회는 화친을 반대하면서 무력으로 흉노를 칠 것을 주장했다.

그러자 한안국이 말했다. “천 리 길을 원정하게 되면 군사들에게 이로움이 없습니다! ······ 
힘찬 활에서 튕겨 나간 강한 화살도 마지막에는 엷은 비단조차 뚫지 못하고, 아무리 맹렬한 바람이라도 끝에서는 가벼운 기러기 깃털 하나 띄우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힘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막판에 힘이 쇠약해졌기 때문입니다! 흉노를 토벌하기 어려우니 화친을 하는 것이 낫습니다!” 여러 대신 들이 한안국의 의견에 동의하자 무제도 화친을 허락했다.

한무제는 나중에 강공책으로 바꿔 흉노를 정벌 했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한장유열전 (韓長孺列傳)〉》에 나온다. 같은 이야기가 《한서(漢書) 〈한안국전(韓安國傳)〉》에도 나오는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이들으니 맹렬한 바람도 쇠해지면 깃털도 일으키지(날리지) 못하고, 강한 쇠뇌의 끝은 그 힘이 비단도 뚫지 못하다고 합니다.(且臣聞之, 衝風之衰, 不能起毛羽. 强弩之末, 力不能入魯縞.)

좀더 참고 기다려 봅시다. 저쪽이 아무리 저렇게 강하게 나온다고 해도, ‘강노지말’ 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화가 누그러져서 합의를 해줄 것입니다.

고대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세계의 가운데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름도 중국(中國)이라고 했다. 그리고 주변의 국가나 민족을 각각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호칭하며, 오랑캐의 국가라고 무시했다. 

이 오랑캐들 중에서 중국의 골머리를 가장 아프게 한것이 바로 흉노(匈奴)로 대표되는 북적이란 존재였다. 농경민족에 속하는 남방과 동방의 오랑캐들은 보편적으로 중원의 문화를 동경하고 스스로 복속을 했지만, 거친 기질을 가진 유목민족인 흉노족은 중화사상으로도 결코 교화되지 않는, 중국인의 영원한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일찍이 춘추전국시대부터 여러 제후국들은 흉노족을 방비하기 위하여 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날 만리장성 이라고 부르는 장성(長城)의 일부이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흉노족은 어떤 민족이며, 어떻게 중국과 악연을 맺게 되었을까? BC771년 북방의 이민족인 견융(犬戎)이 주(周)나라에 침입하여 유왕(幽王)을 죽이고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주나라는 이들의 만행을 견딜 수 없어 수도 호경(鎬京, 지금의 서안)을 버리고 동쪽의 낙읍(雒邑, 지금의 낙양)으로 천도했다. 당시 주나라를 침입했던 북방의 이민족이 바로 후에 중국의 영원한 골칫거리가 된 흉노의 선조이다.

이들은 원래는 북쪽의 미개척지에서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물과 들을 따라 옮겨 살았기 때문에 일정한 주거지가 없었다. 

하지만 어릴 때 부터 활을 당겨 새나 쥐 같은 것을 쏘고 조금 자라면 여우나 토끼 사냥을 했기 때문에, 장정이 되면 활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어 전원이 무장 기병이 되었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목축에 종사하는 한편, 새나 짐승을 사냥해서 생계를 유지하다가 싸울 때는 전원이 군사 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익이 될 만하면 그것을 얻으려고 하였고, 도무지 예의 같은 것은 돌보지 않았다. 

또한 이들은 아비가 죽으면 그 후처를 아들이 아내로 맞고, 형제가 죽으면 그 아내를 남은 형이나 아우가 차지했다.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며 자(字) 같은 것은 아예 없는, 그야말로 문화 민족을 자부하는 중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야만인 그 자체였다.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던 견융은 주나라를 침략한 길에 아예 초확(焦穫, 섬서성 경양현(涇陽縣) 서북)이란 지역을 빼앗아 그곳에 머물러 살면서 주나라를 침범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이 북방의 이민족은 중국의 영원한 골칫거리가 되었으며, 중국인들은 이들의 침략을 방비하는데 국력을 쏟아야 했다.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천하를 통일한 후 여러 가지 사업을 벌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만리장성의 축조였다. 진시황제는 전대에 쌓은 장성들을 보수하는 한편, 장군 몽염(蒙恬)을 파견하여 임조(臨洮, 감숙성 민현(岷縣) 임담(臨潭))부터 동쪽으로 요동(遼東)까지 장성을 수축했는데, 역시 북방의 흉노족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진시황제에 이어 천하를 통일하고 한(漢) 나라를 세운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북방의 흉노를 방어하기 위해 한왕(韓王) 신(信)을 북방의 마읍 (馬邑, 산서성 삭주시(朔州市) 동북)에 봉했다. 

그런데 흉노가 마읍을 포위하자 신은 유방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흉노에게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 유방은 군대를 출동시켜 신을 구했는데, 그동안 신이 자주 흉노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사람을 보내어 그를 꾸짖었다. 

신은 두려움에 떨다가 궁리 끝에 흉노에게 항복 하고 도리어 진양(晉陽, 산서성 태원시(太原市))을 공격했다. 유방은 친히 32만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신의 군사를 격파했으며, 신은 흉노로 달아나 버렸다.

유방은 흉노를 얕잡아 보고 주력 부대를 뒤에 놓아둔 채, 일부 병력만 거느리고 평성(平城, 산서성 대동시(大同市))로 군대를 출동 시켰으나, 평성에 이르기도 전에 백등(白登, 평성의 동북쪽, 산서성 양고현(陽高縣))에서 흉노의 선우(單于) 묵돌(冒頓)의 40만 정예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묵돌은 집요하게 포위망을 압축해 들어왔으며, 설상가상으로 겨울철이어서 한나라의 군사들은 추위에 떨고 동상에 시달리기 까지 했다. 

유방의 모사, 진평(陳平)은 화공에게 미인도를 그리게 했다. 미인도와 후한 선물을 선우가 가장 총애하던 연지(閼氏, 흉노의 황후)에게 보내고, 한나라 천자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림과 같이 아름다운 본국의 미녀들을 소집하여 묵돌에게 보내려 한다고 말해 주었다. 

연지는 놀라 묵돌을 달래었다. 마침 약속을 했던 한왕 신이 그때까지도 도착하지 않자 혹시 신과 유방의 군대가 서로 짜고 자신을 협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 묵돌은 포위한 지 7일 만에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그 뒤로 유방은 어쩔 수 없이 외교 방식을 바꾸어 흉노와 화친을 맺었는데, 그 조건은 ‘한나라의 적장(嫡長) 공주를 선우의 아내로 줄 것, 해마다 피륙과 곡식 · 술 · 음식 등을 보낼 것, 한나라와 흉노가 형제가 될 것’ 등으로 한나라 입장에서 보면 매우 굴욕적인 조약이었다. 조약을 맺은후 부터 한나라와 흉노 사이에 전쟁다운 전쟁은 없었다.

한고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에 등극 하였을 당시에는, 춘추시대부터 시작되어 거의 600년 동안 계속된 오랜 전란으로 사회 · 경제가 완전히 피폐해진 상황이라서 황실에서 쓸 물자도 부족했고, 심지어는 황제가 타고 다닐 말이 없어서 소가 끄는 수레를 탈 정도였다. 

하지만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일컫는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시대를 거쳐 무제(武帝) 시대 에 들어와서는 식량과 말이 넘쳐나면서 군량과 군마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러자 70년 동안이나 흉노에게 시달려 미인들과 식량 등 많은 물자를 바쳐야 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전에야 상대방이 강하고 우리가 약했으니 인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화친을 택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한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삶과 몸은 늘 좋거나 건강 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강노지말'을 잊지않는 지혜로운 하루가 되시기를 '베트남 다낭 공항'에서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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