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탄불상용 : 氷炭不相容) [제 2.182회]

학창시절에 가장 많이 읽었던 책은 삼국지였다. 그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역시 관운장이다. 독화살을 맞아 명의인 화타가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는 가운데서도 태연히 바둑을 두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인내의 화신이라고 할 정도이며 행동이 군자답다.

삼국지에는 등장하는 인물의 숫자만 하여도 어마어마하다. 충신이 있고, 간신이 있고, 성웅이 있고, 간웅이 있다. 모사가 있고, 책사가 있고, 성군이 있으며 폭군이 있다. 

나이 들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말라고 한다. 요리조리 눈치를 살피고 곁눈질 하면서 소인이 되기 때문이리라. 군자와 소인은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이다.

문장이나 시가 아주 뛰어남을 말 할 때에 쓰는 말로 ‘절묘호사(絶妙好辭)’라는 말이 있다. 이 고사성어도 삼국지에 나온다.

후한 말에 조아는 아버지 조우가 강물에 빠져서 죽었는데 시체를 찾지 못하였다. 열네 살의 조아는 아버지가 빠진 강기슭을 오르내리며 밤낮으로 울부짖기를 17일간이나 하였다. 조아는 죄책감으로 결국 강물에 몸을 날렸다. 순간 조아는 물속에서 아버지 시체를 업고 강둑으로 나왔다.

이 효녀 조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위나라의 학자 한단순은 애도하는 글 뇌사를 지어 비문에 남겼다.
같은 시대 후한의 문인이며 서예가인 채옹은 효녀 조아의 뇌사 비문 내용이 너무 좋아 비 뒤쪽에 ‘황견유부외손제구’라는 여덟 자의 글을 남겼다.

조조가 젊은 시절 친구 양수와 여행을 하다가 효녀 조아의 비문 곁을 지나게 되었다. 한단순이 쓴 뇌사를 읽고 두 사람은 감탄하였다. 그런데 비문의 뒤편에 채옹이 쓴 여덟 자는 해석이 어려웠다.

그런데 양수는 금방 내용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조는 양수에게 십리를 가서 두 사람의 내용이 맞는지 검증해 보자 하였다.

십리를 와서 양수는 ‘황견(黃絹)은 누른색의 비단이니 절(絶)이 되고, 유부(幼婦)는 젊은 여자이니 묘(妙)가 되고, 외손(外孫)은 시집 간 딸과 그 아이를 말하니 호(好)가 되며, 제구는 매운 음식을 받는 것이니 사(辭)가 된다’고 하였다. 

‘절묘호사(絶妙好辭)’란 내용이 두 사람 모두 일치하였다. 조조는 양수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 후일 양수를 제거한다. 이렇게 상반되는 경우도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삼천갑자 동방삭(東方朔)의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무제는 한나라 최대 부흥을 이룬 황제이다. 동방삭은 책을 많이 읽어 학문에 통달해 있었다. 당시는 종이가 발명되지 않아 글자를 죽간에 쓰던 시절이었다. 

대나무에 칠을 해서 글을 쓰거나 대나무에 칼로 새기는 방법이었다. 동방삭은 죽간 삼천 장이나 되는 엄청난 분량의 글을 써서 무제에게 바쳤다. 무제는 그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데 2개월이 걸렸다. 그 후 무제는 동방삭을 측근으로 등용하여 그를 자주 불러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어쩌다가 식사를 하는 날이면 동방삭은 남은 음식을 옷에 싸 갔고, 무제가 비단 옷을 주는 날은 입지 않고 어깨에 들춰 메고 갔다. 의복은 항상 지저분하고 의관은 단정치 못했다. 

오래되어도 동방삭의 벼슬은 서기에 지나지 않았고 지위는 말단 의전비서에 머물렀다. 자연스레 주위 관리들은 동방삭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다.

동방삭은 노년이 되어 죽음이 가까워지자 무제에게 시경의 ‘윙윙거리며 울타리에 날아 앉은 청파리처럼 중상 모략하는 자가 많다. 현명한 사람이여! 그것들에 귀 기울이지 말라. 그것은 끝도 없으며 천하를 어지럽힌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숨을 거두었다.

동방삭이 죽자, 무제는 한탄하며 혼잣소리로 ‘새가 죽을 때는 그 울음소리가 서글프고, 사람이 죽을 때는 그 말이 착하다던데…’ 하고 아쉬워했다.

평소 동방삭이 아들에 남긴 말은 ‘남에게 미움 받지 않는게 으뜸이다. 무릇 충신과 간신은 얼음과 불의 관계와 같은 것이어서 화합 할 수 없다(氷炭不相容)’고 했다.

오늘도 봄기운이 완연한 날씨속에 늘 생기가 넘치는 기분좋은 수요일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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