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과 위기관리 리더쉽 -

🌿 손자병법/14부(2/2) [제 2.164회] 🐾

-이순신과 위기관리 리더쉽 -
(어제에 이어집니다)

당파 싸움을 중심으로 한 그 내막은 여기서 논하지 말자. 중요한 것은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것이다. 이때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1년 전인 1591년 3월 중순이었다. 

이때 부터라도 정신을 차려 일본의 침략에 대비 해 전쟁을 준비 했더라면 그렇게 참혹한 전란(戰亂)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도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은 돌았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수군폐지론(水軍廢址論)이 논의되고 있었는데, 일본군은 해전에는 능 하지만 육지에 오르면 민활하지 못하다는 이유에서 였다. 

수군폐지론은 당시 조정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신립(申砬) 장군까지 합세 해 그 기세가 대단했다. 자칫 수군이 없어질 판 이었다. 바로 이때 이순신 장군이 혜성(彗星)같이 등장했다. 

임진왜란 발발 1년2개월 전에 일개 정읍 현감에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즉 전라 좌수사로 전격 발탁된 이순신 장군이 이를 강력히 반대하는 장계를 올린 것이다. 

“해적을 막는데는 해전이 제일이므로 수군을 절대로 폐 해서는 안 됩니다.”(선묘중흥지)

유비무환! 
백 마디의 말이 소용없다. 
실제로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위기 때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이순신은 그동안 소문으로 나돌던 일본의 침략을 그저 소문으로만 듣지 않았다. 

전국시대를 마감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반드시 조선을 침략 할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이순신의 탁월한 선견지명이다. 전라좌수사로 임명돼 여수에 도착 하자마자 곧바로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적의 의도가 어떻든지 확실한 ‘능력’을 키우려 한 것이다. 예하 5관(官) 5포(浦)에 대한 초도 순시를 시작으로 전투 준비 태세를 점검했다. 무너진 성곽을 보수하고 무기체계를 정비했다.

"이순신, 활쏘기 명중률 84% 기록"
임진년 정월 16일자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이 이때 얼마나 전투준비에 신경을 곤두 세웠는지를 알 수 있다. 

“……방답(防踏)의 병선(兵船)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곤장을 쳤다. 

우후(虞候·절도사에게 속한 무관)와 가수(假守·임시직 관리)도 역시 단속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해괴하기 짝이 없다. 자기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날이 짐작 할 만하다. 

성 밑에 사는 토병(土兵) 박몽세는 석수랍시고 선생원 (先生院)에서 쇠사슬 박을 돌 뜨는 곳에 갔다가 이웃집 개에게 까지 피해를 끼쳤으므로 곤장 80대를 쳤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전투 준비를 소홀히 한 책임자는 용서 없이 처벌 했다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민폐를 끼친 자도 반드시 처벌을 했다는 것이다. 

2월 25일자 일기에도 “여러 가지 전쟁 준비에 결함이 많아 군관과 색리들에게 벌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3월 4일자 일기에도 “서문 밖에 해자 구덩이와 성벽을 더 올려 쌓는 곳을 점검했다. 

승군들이 돌 줍는 일에 불성실 했기에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속세를 떠난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전쟁준비에 소홀히 하면 가차 없었다. 

이순신의 관심은 온통 전쟁 준비였다. 그 외의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부대 전체의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했지만 그 자신도 활쏘기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난중일기 전체에서 이순신이 활쏘기를 한 기록은 대략 270여 회나 나온다. 병중(病中) 이거나 제사 또는 나라의 특별한 일 외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활을 쐈다는 얘기다. 

특히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의 일기를 보면 집중적으로 활을 쏘는 기록이 나온다. 심지어 술자리를 하면서도 활쏘기를 멈추지 않았다. 

3월 16일자 일기를 보면 이렇다. “순천부사가 환선정(喚仙亭)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겸하여 활도 쏘았다.” 과연 프로답다. 참고로 이순신의 활 솜씨를 잠시 엿보자. 

3월 28일자 일기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활 10순(巡)을 쏘았는데, 다섯 순은 연달아 맞고, 2순은 네 번 맞고, 3순은 세 번 맞았다(十巡卽 五巡連中 二巡四中 三巡三中).”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풀어보자. 1순은 5발(矢)이다. 처음 다섯 순은 모두 맞혔으니 25발 명중이다. 이를 몰기(沒技)라 부른다. 

2순은 각각 4발을 맞혔으니 총 8발 명중이다. 
3순은 각각 3발을 맞혔으니 총 9발 명중이다. 이를 합하면 25+8+9=42가 된다. 

즉 50발 중 42발이 명중된 것이니 84%의 명중률이다. 이 정도의 실력이면 현재 대한궁도협회에서 정한 8단의 기준인 82%를 넘는 수준이다.

무엇보다 이순신의 전쟁 준비 가운데 압권(壓卷)은 거북선의 건조다. 물론 거북선은 이순신의 창작품은 아니다. 이미 170년 전의 태종실록에 거북선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태종 당시의 ‘위협용 거북선’을 개량 해 총포를 최대한 장착한 ‘전투용 거북선’으로 새롭게 건조했다. 

4월 12일자 일기를 보자. “식사 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의 지자포(地字砲), 현자포(玄字砲)를 쏘았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만8.700명의 일본군을 동원 해 조선 땅을 침략했다. 

손자는 말한다. 
세상의 리더들이여! 
쓸데없이 전쟁이 날 것인가 말 것인가를 탁상공론하지 말라. 그 대신 적이 감히 쳐들어 오지 못할 확실한 준비태세를 갖추도록 하라. 

나라가 어수선 할 수록 본질에 충실 하도록 합시다. 기업인은 품질 좋은 상품을 개발하는데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정치인은 주변국을 돌아보고 미래지향적 전략 마인드로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민이 잘 살게 하는 길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군인은 적이 감히 넘보지 못 할 위협적이고 강력한 전투력을 갖추는데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순신장군과 같은 유비무환의 정신과 준비태세를 갖추는 주말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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