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만 봉화산 기슭에 두레마을을 시작하자 입소문으로 공동체 생활에 뜻이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더니 1년여 지나자 150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150여 명이 한 솥에 밥을 먹으며 한 울타리에서 자며 너 것 내 것 없이 공동소유하고 공동노동하며 공동생활을 하게 되니 두레마을이 활기(活氣)를 더하여 가게 되었다.

두레마을은 시작하던 때로부터 "땅과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를 이룬다는 목표를 걸고 시작하였기에 농사를 짓되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조상들이 농사짓던 자연방식으로 농사짓는 것을 고집하였다. 이런 농업이 어려운 것은 여름철 논밭에서 잡초잡기가 가장 어려웠다. 오뉴월 뙤약볕에 구슬땀을 흘리며 김매기 작업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웃 밭에서는 제초제 한나절 뿌리면 깨끗이 해결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며칠간을 김매기를 하노라면 맥 빠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두레마을 가족들은 초심(初心)을 지키자고 서로 격려하면서 자연농업을 진행하였다. 그 시절에는 정부에서도 다수확에 눈이 멀어 농약피해 같은 데는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알뜰히 김을 매며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농사를 지으니 공무원이 찾아와서는 자연농법을 중단하기를 강권하였다. 지금은 수확량이 문제이지 농산물의 질(質)이 문제가 아니란 것이었다. 그 시절엔 벼농사도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를 농민들에게 강권하면서 우리가 통일벼를 심지 아니하고 아끼바리 일반 벼를 심으니까 면직원이 논에 찾아와서 심어놓은 벼 포기를 뽑아버리기까지 하던 때이다.

나라가 가난하였기에 다수확 하여 식량자급에 정부가 그 정도로까지 열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레마을 공동체는 <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농업을 일으킨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벼를 수확하여 제 값을 받기 위하여 우리 부부는 트럭에 쌀을 직접 싣고 서울 압구정동으로 가서 주문하는 아파트 집집에 등에 벼 가마니를 지고 배달하였다.

나는 체력이 강한 편은 아니어서 80Kg짜리 쌀 한 가마니를 등에 매고 아파트 층계를 올라가노라면 때로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쓰려질 것 같았다. 그러나 중단하지 아니하고 주문 받은 쌀을 배달하고 아내는 자연 속에서 기른 닭을 팔며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려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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