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반 서울시는 청계천 판자촌 지역 철거를 시작하였다. 우리는 철거민들 중에 농촌으로 내려가 농사짓고 세금도 내며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로 활빈귀농개척단(活貧歸農開拓團)을 조직하였다. 우리가 귀농키로 정한 지역은 경기도 화성군 소재의 남양만 간척지(南陽灣 干拓地)였다. 남양만에 바다 갯벌을 막아 960만평의 농토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곳에 15개 마을에 1200세대가 입주하게 되었다. 우리는 공동체 마을을 세우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50세대를 한 마을에 입주하여 너 것, 내 것 없이 공동 소유하고, 공동 작업하고, 공동으로 누리는 마을을 건설하려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계획을 들은 정부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가 개입하여 우리들이 이루려는 공동체 마을이 북한의 집단농장과 유사하여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그래서 우리 일행을 15개 마을에 분산시켜 입주케 하였다. 어쩔 수 없이 15개 마을에 분산되어 살게 되었으나 생각지 않게 좋은 점이 있었다. 짧은 기간에 15개 마을 1200세대들을 단기간에 조직화(組織化)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7개의 교회를 동시에 개척할 수 있었다. 남양만 주민회를 조직하고 교회가 센터가 되어 주민봉사와 지역사회 개발을 통한 복음 선교란 두레선교운동의 기본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소금기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소금 땅 간척지에서 벼농사를 짓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첫 해 농사에 벼 심기를 무려 4번이나 되풀이 한 후에야 겨우 벼가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된 정도였다. 처음에 내가 살게 된 마을은 독정리란 마을이었다. 40세대 정도가 입주하게 된 작은 마을이었다. 이른 봄에 벼 싹을 키우는 못자리를 만들 때에 나는 집집을 돌며 설득하였다.

못자리를 따로 따로 만들면 인력 낭비, 자원 낭비, 시간 낭비일 테니 마을 주민 전체가 공동 못자리를 만들어 순번으로 돌보면 40명이 할 일을 한 명이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면 다른 39명은 각자 자기 일을 하면 좋지 않겠느냐. 이것이 공동체 정신의 실천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마을을 키부츠라 부른다. 우리도 키부츠 비슷하게 시작해 보자 설득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잘 진행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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