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우려는 공동체 마을을 ‘두레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짓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 것은 1974년 서울구치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때였다. 서울구치소는 서대문에 있는 구치소로, 그때는 유신체제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이어서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것만으로도 사형까지 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었다.

그해 1월 17일 당시 뜻을 같이 하던 한국교회 목사, 전도사 33명은 "유신헌법을 폐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라, 정치는 민간에 맡기고 군은 국방에 전념하라!" 등의 구호를 내세우고 종로5가에 있는 한국교회협의회 KNCC 사무실 앞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벌였다. 우리 일행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다.

그 시절 중앙정보부는 남산 중턱에 있었다. 그로부터 두 달간 길고 긴 조사기간을 거쳐 군사재판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우리 같은 정치범들은 독방살이였다 0.7평 좁은 방에 홀로 살며 성경 읽는 일과 운동하는 일이 전부였다. 그런데 가끔은 일반 죄수들 방에 합방(合房)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한번은 8명이 수감된 방으로 합방이 되었다. 나까지 9명인데 방의 크기는 3평이 되지 못했다. 잠 잘 때면 바로 눕지를 못하여 한쪽 어깨만 붙이고 칼잠을 자는 처지였다. 그런데 그렇게 좁은 방에서 다툼이 그치지를 않았다. 서로가 으르렁거리며 말다툼, 주먹다툼, 욕이 그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하면 다툼 없이 형제처럼 지내는 방분위기를 이룰까를 고심하였다. 나는 나부터 실천할테니 모두가 함께 소유하고, 함께 사용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아홉 명이 한 부모 밑에 자란 형제처럼 지내자고 제안하였다. 처음엔 나를 빨갱이 아니냐고 몰아세우던 사람들이 끝내는 설득되었다. 그리고 치약, 비누, 영치금, 필기도구 등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렇게 공동체를 이루고 나니 방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라졌다. 언어가 순화되고 서로 격려하고, 밖에 있는 가족들의 어려움을 돕는 일에까지 서로 힘이 되어 주었다. 그때 공동체의 위력을 실감하였고, 언젠가 석방되어 나가면 공동체를 이루는 목회를 하겠다는 뜻을 굳혔다. 그리고 세우게 될 공동체의 이름을 ‘두레마을’이라 지었다. 이것이 두레마을이 탄생된 스토리이다.

저작권자 © 인터넷조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