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0주년, 하얼빈 현장 르포②]

[조은뉴스=강성태 기자]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 하얼빈[哈爾濱, Harbin]역. "탕, 탕, 탕" 3발의 총탄에 국적 1호인 ‘조선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졌다.

을사늑약의 한을 안고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 의병을 일으킨 청년의 총탄이 69살 한국 침략 원흉의 가슴을 꿰뚫었다. 청년은 러시아 헌병대에 붙잡혀 쓰러지면서도 가슴에 성호를 긋고 외쳤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크게 외쳤다.

“까레야 우라! 까레야 우라! 까레야 우라!” 러시아어로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를 뜻한다. 100년 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장면이다. 광역매일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아 하얼빈 현지 모습을 르포기사로 지면에 담는다.<편집자 주>

14일 오전, 조선족 통역 김미나씨와 현지 가이드를 자청한 구어 지아(郭佳)씨가 아침부터 부산을 떨면서 안내한 곳은 하얼빈의 명동, 중앙다제 거리.

러일전쟁(1904~05) 동안 만주에서 러시아의 군사작전기지였던 하얼빈은 1917년 러시아 혁명 뒤 러시아에서 도망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됐으며, 한때는 소련 밖의 도시 가운데 러시아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기도 했다.

때문에 하얼빈 곳곳에는 아직까지 당시의 문화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얼빈에서 가장 번화한 중앙다제 거리는 러시아 여행을 온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러시아식 석조 건물들이 늘어선 이국적인 거리였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띈 건축물은 9년간의 공사를 거쳐 1932년 완성된 소피아 성당. 그리스정교회 성당으로 53.35m 높이에 전체 면적이 721㎡로 극동지역에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196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에 건물본체가 훼손됐고, 성당 내 벽화와 십자가가 유실됐지만 현재는 성당의 내부까지 원래모습으로 복원됐다.

소피아 성당의 역사와 상관없이 건물은 비잔틴 양식의 전형적인 러시아식 성당이라 마치 영화에서 본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와 있는 느낌을 들게 했다.

“낮보다는 밤이 더 아름답다. 태양 아래서는 웅장함을 드러내지만 휘황찬란한 조명불빛 아래서는 아름다움을 뽐낸다. 이런 풍경으로 하얼빈은 ‘동방의 모스크바’라는 애칭도 얻게 됐다.”는 게 가이드를 맡은 구어 지아씨의 설명이다.

그러나 중앙다제 거리의 밤 정취를 맛볼 틈도 없이 서둘러 자리를 옮겨야 했다. 구어 지아씨의 가족들이 저녁식사에 초대했기 때문이다. 하얼빈에서 구어 지아의 가족들은 제법 상류층이다.

어머니는 공무원이었고, 아버지는 무기학을 연구한 교수였다. 고모부는 하얼빈을 관장하는 흑룡강성의 현직 대법관이다. 중국사회에서 상류층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흔치않은 기회에 내심 기대감이 컸다.

택시로 20여분 이동해서 도착한 곳은 한눈에 봐도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당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10명 남짓한 구어 지아씨의 가족들은 낮선 이국인을 스스럼없이 반겨줬다. 잠시나마 경계심을 가졌던 스스로가 미안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어진 식사시간. 한국과는 달리 10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모두 한 가지 이상의 요리를 주문했다. 식사라기보다는 만찬이었고, 일종의 파티였다. 식사에 초대한 구어 지아씨는 중국인들 대부분이 지금처럼 식사를 즐긴다고 귀띔했다.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식사시간이 보통 2시간을 넘긴다. 구어 지아씨 가족들과의 식사시간도 무려 5시간을 넘겨서야 마무리 됐다. 길어야 30분 안팎인 한국인들의 식사습관에 비긴다면 무척이나 풍요롭고, 여유가 넘쳤다.

다소 익숙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들과 장시간동안 식사를 즐기면서 어느새 이방인이 아닌 하나가 돼 가고 있었다. 나라가 다르고, 문화와 환경이 다르지만 이 곳 역시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식당 밖 거리. 영하 16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지만, 훈훈함이 넘쳐나는 이국인들의 배려가 타국의 밤공기를 살갑게 만들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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