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청렴 사연·수기 공모전] ④ 공직부문 우수상

청탁금지법의 시행 등 청렴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부와 국민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그 일환으로 국민권익위원회는 청탁금지법으로 바뀐 삶의 이야기 등 청렴과 관련된 국민들의 수기 공모전을 진행했다. 올해로 세번째를 맞이한 공모전 우수작을 정책브리핑에서 공유한다. 과연 우리는 생활 속 청렴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을까? 쉬운 듯하면서도 어렵게 느껴지는 청렴의 의미를 국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 번 더 생각해보자.(편집자 주)

* 수상자 중에는 공익신고자가 포함돼 있어 개인 실명 등은 밝히지 않음을 양해바랍니다.

“저는 어부의 아들입니다!”

이 말은 제가 해양수산부 임용을 위해 최종면접 당시 면접관님들 앞에서 당당하게 했던 자기소개의 첫 구절입니다. 네! 맞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험난한 파도를 헤치며 고기 잡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오신 어부이십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본인의 배를 가질 수 없었던 아버지께서는 남의 배의 선원으로 일하셨습니다. 바다에 일하러 나가시면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보름 가까이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오랜만에 일을 마치고 오신 아버지의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과 여름철 논바닥 갈라지듯 갈라진 손바닥을 보면 바다에서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고생을 하셨음에도 집안 살림은 나아지질 않았고, 어머니께서는 바다에 나가 바지락이며 미역이나 청각 같은 해조류를 채취해 시장에 나가 팔아 우리 오남매를 먹여 살리셨습니다.

먹고살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살림에 아버지께서는 그 흔한 담배조차 피우지 않으시고 술 한 잔 입에 안 대시며 조금씩 저축을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중학생이 되던 해에 아는 지인으로부터 작은 중고어선 한 척을 사셨습니다. 일생일대의 꿈이셨던 한 선박의 선장이 되셨던 겁니다. 물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아버지께서는 선원을 부릴 수가 없어 어머니와 같이 일하기로 하셨습니다.

우리 오남매는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위해 드릴 선물이 없을까 고민하다 큰누님의 제안으로 헌배를 새 단장하기로 했습니다. 낡은 페인트는 걷어내고 위쪽은 새하얀 페인트로, 물이 잠기는 아래쪽은 노란색으로 정성껏 색칠을 하고 뱃바닥에 붙어있는 따개비며 해초류는 박박 긁어냈습니다.

그렇게 우리 오남매가 한나절동안 고생해서 단장이 끝난 배는 어린 제가 보기에도 그럴싸했습니다. 물론 아버지 어머니께서도 매우 흡족해하셨고 아버지께서는 우리가족 처음으로 외식을 시켜주셨습니다. 생전 처음 탕수육이란 걸 먹어봤습니다. 그때 처음 먹어 봤던 탕수육은 그 땡볕에서의 수고를 말끔히 씻어내고도 남을 만큼 맛있었습니다.

그날 아버지께서는 매우 행복해하셨습니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작고 보잘것없는 중고어선이었지만 그 배는 그 어떤 배보다 크고 멋진 우리 집 보물1호 였습니다. 못하시는 막걸리도 한 사발 들이키시면서 눈물 글썽이시던 아버지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고 가슴이 찡해 옵니다.

지상에는 도로가 있고 인도가 있듯이 바다에도 물고기들이 지나다니는 길이 있습니다. 이런 길에 그물을 드리워 그 그물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다 그물에 꽂혀서 잡힌 고기를 어획(漁獲)하는 그물을 ‘자망’이라고 합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이 자망어업을 하셨습니다.

‘노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저희 집 가훈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는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시고 늦게까지 일하셨습니다. 특히 어머니께서는 저희 오남매 학교 갈 채비부터 집안일까지 하시면서 바닷일을 하셨으니 그 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정도로 고되고 힘들었을 겁니다.

새벽녘 만선의 꿈을 안고 출항하시면 저녁 즈음에 들어오시곤 하셨습니다. 한두 척씩 어판장 앞 부두에 배들이 모여 그날 잡은 고기를 배 앞에 경매하기 좋게 나열해 두었습니다. 가장 떨리는 순간은 경매사아저씨가 그날 잡은 고기의 무게를 목청껏 외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영진호 100kg요~ 태광호 90kg요~ 동백호 105kg요~” 경매사아저씨의 호명은 마치 학창시절 성적표 받을 때의 떨림 같은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우리 배를 호명하는 순간 “동진호 45kg요~”

이럴 수가… 믿기지 않았습니다. 145kg를 잘못 들었나 싶어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어떻게 저희 아버님보다 늦게 일어나시고 일찍 들어오시는 옆집 김선장님보다 적게 잡을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아랫집 이 선장님은 우리집보다 배도 작은 분 아니었던가.

뭔가 못마땅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저도 분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칫! 그 말은 순 엉터리야!” 어린 마음에 ‘아빠가 고기 잡는 실력이 모자라셔서 다른 선장님들보다 적게 잡으시나?’하고 철없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아이고 우리집도 삼중망 썼으면 200kg, 300kg로 잡았겠네~” 그 이유는 다음 날 어머니의 푸념 섞인 넋두리를 우연히 들으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옆집 김선장님을 비롯하여 우리 동네에서는 ‘삼중망’이라는 불법어구(不法漁具)를 사용하여 어획하는 일이 이미 공공연한 비밀로 ‘법을 지키는 사람이 바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퍼질 정도였습니다.

이 삼중망이라는 어구를 사용했을 경우 일반 합법적인 어구보다 훨씬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시고 늦게까지 일하셔도 어구성능이 비교가 안 되는 저희 아버지께서 고기를 많이 못 잡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 날 아버지께 여쭤봤습니다.
"아빠! 우리도 그 삼중망! 그거 쓰면 안 돼요? 그럼 우리도 고기 많이 잡을 수 있잖아요." 그때 아버지께서 제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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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고기는 많이 잡을 수 있겠지. 나도 고기 많이 잡아서 우리 영민이가 사고 싶어 하는 자전거도 사주고 용돈도 많이 주고 싶구나. 근데 영민아. 그 삼중망이란 걸 쓰면 바다에 있는 어린 고기들까지 다 잡아버려서 나중에는 잡을 고기가 없어진단다. 당장에는 이익이 되는 일이지만 나중을 보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지. 나라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란다.”

그제야 아버지께서 남들 다 쓰는 삼중망을 안 쓰시는 깊은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를 알고 나서는 실력이 없어 고기를 못 잡는다 생각했던 제 모습이 너무나 한심하고 아버지께 죄송했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날도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열심히 잡으신 고기를 어판장에 팔러 갔습니다. 오랜만의 만선에 싱글벙글 웃으시며 어판장으로 향했던 그 날, 이상하게도 어판장에 나온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었습니다. 옆집 김선장님도 아랫집 이선장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버님도 의아하셨던지 “다들 어디 갔습니까??” 물으셨고 경매사님께서는 “아, 모르셨어요? 이번에 불법어구 일제 단속 나왔잖아요.”라고 하셨습니다.

알고 보니 그 전날 우리 동네에는 불법어구 일제단속이 나왔고 단속반원들은 배에 실려 있던 불법어구와 어획한 생선들을 모두 압수해가고 선장님들은 큰 벌금을 맞았다고 했습니다. 합법적인 어구를 쓰신 아버지만 그 단속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날은 처음으로 아버지께서 어판장에서 1등 한 날이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고기를 팔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다른 선장님들을 걱정하시던 아버지를 보며 제 머릿속에서는 또 다른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원리 원칙대로만 사시는 아버지가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편법과 꼼수로 주변 사람들은 그 흔한 죄책감조차 가지지 않고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아버지가 옳았습니다. 청렴하게 살아왔던 아버지께 세상은 1등이라는 값진 선물로 보상을 해주었습니다. 그날은 ‘부당한 이득은 결국 손해와 같다’는 제 일생일대의 크나큰 교훈을 얻는 날이었습니다.

청렴수기를 쓰고 있는 지금 아버지께 새삼 안부전화를 드리며 “아버지 ‘청렴’이 무슨 뜻 인줄 아세요?”라고 여쭤봤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청렴? 그거 착하게 사는 거 아니냐?” 이렇게 짧고 퉁명스럽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버지 착하게 사는 게 청렴한 거 맞아요. 잠깐 눈앞에 이익보다는 멀리 내다 볼 줄 알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소신 있게 살아오신 아버지 인생이야말로 청렴한 인생입니다.”

고생하시는 어머니 수고를 도와드릴 요량으로 가끔 어머니를 대신해 제가 아버지를 따라 나가 뱃일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배를 조종하는 법과 배를 어디로 몰아야 되는지, 어디 가면 고기가 많이 있는지 등등 많은 걸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이야 GPS나 레이더 등 첨단장비가 많이 있어 배를 조종하기가 한결 수월해졌지만 그 당시 그런 장비가 없던 아버지께서는 등대를 보며 방향을 가늠하셨습니다. “네가 어디에 있건 저 등대만 보고 가면 네가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갈 수 있단다.” 안개가 끼건 비가 오건 아버지께서는 방향을 가늠하실 때는 항상 등대를 먼저 찾으셨고, 그때마다 등대는 밝게 빛나주었습니다.

그때의 영향이었을까요? 저는 바다에서 길을 알려주는 등대를 관리하는 평택지방해양수산청 항로표지과에 임용이 되어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고자 하는 길을 알려주던 등대를 관리하는 선박에 승선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등대를 볼 때면 그날 어판장에서 1등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적당히 불의와 타협하고 남들이 하기에 그저 나도 한다는 자기 합리화로 눈앞에 이득을 취하기보단,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소신 있게 살아오셨던 아버지의 인생 말입니다.

공직생활하면서 해이해질 수 있는 순간이나 불의와 타협을 해야 하는 유혹이 올 때면 아버지가 행동으로 보여주셨던 그 가르침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가야할 길을 알려주는 등대처럼 그곳 그 자리에서 제가 가야 할 길을 밝게 비춰주고 있습니다.[문화체육관광부 국민소통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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