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TV에서 수능시험을 앞둔 자녀들을 둔 어머니들이 등에 자식의 이름을 붙이고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하는 모습이 방영된 적이 있다.

독자들 중에도 보신 분이 여럿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 모습을 보며 얼굴이 빨개졌었다.

자녀들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저러지 한편으로는 측은지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관용돼서는 안 된다. 그들의 행태는 신앙이 아닌 무당에게 가서 굿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자녀의 이름을 등에 붙이고 기도하는 중심에는 형통에 대한 그릇된 성경관이 있기 때문이지 싶다.

자녀들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욕심에 목회자의 부추김이 만들어낸 합작품이 바로 등에 이름 붙이고 “주여 삼창”하는 코미디로 나타난 것이리라.

그들은 도대체 어떤 형통을 배웠기에 이런 저질 코미디를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걸까?

목회자들은 뭐라고 가르쳤기에 그들을 모아놓고 “주여 삼창”을 강요하는 걸까?

무엇이 초등학생을 밤 11시까지 학원으로 돌려 그들에게 처진 어깨를 선물(?)로 준 걸까?

과연 부모들의 자녀를 향한 지나친 들볶음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거룩한 욕심 때문이던가?

물론 그들은 목소리를 높인다.

“아이가 열심히 공부해 높은 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정말인가?

정말 하나님 때문에 자녀들의 성공을 기원하는 건가?

개천에서 용 난다는 표현이 있다.

해당 표현은 신분상승이 성공이라는 칭찬과 부러움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개천에서 용 나는 세상이 돼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개천에서 용 난 사람을 부러워하고 드높이는 사회가 돼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개천에서 용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짓밟아야 하는지 혹시 아는가?

개천에서 용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눈에서 피눈물을 뽑아내야 하는지 혹 알고 있는가?

개천에서 용이 나는 걸 당연시하는 사회는 신분 서열제를 정당화하고 갑질 문화를 양산하는 주범이다.

극소수의 용이 모든 걸 독식하게 하는 승자독식주의가 성공과 번영이라는 기만의 포장지로 덮여 우러름을 받을 때 그 사회는 “땅콩 비행기”라는 괴물을 만들었다.

이처럼 치열하게 전투하며 “너 죽고 나 살자!” 식 투쟁의 삶이 과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보는가?

필자는 단정해서 말할 수 있다!

이런 전투 시스템은 정확하게 사탄이 영광을 받는 문화지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문화가 아니다.

요한계시록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일곱 봉인을 여실 때 적그리스도가 흰 말을 타고 마치 자기가 예수님인 것처럼 가장해 등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성경을 적그리스도를 이렇게 묘사한다.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그렇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정체다.

그는 늘 투쟁한다. 그는 늘 남을 밟고 일어서 정복하려고 한다. 그는 늘 타인을 다스리려고 한다. 그는 늘 자신이 주인이 돼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는 늘 최고가 돼야만 흡족하다.

적그리스도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표현 그 자체다!

문제는 긍정의 힘에 나타난 형통의 개념이 정확히 적그리스도의 속성을 닮았다는 점이다.

긍정의 힘 57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오스틴은 비행기 이등석에 앉아 있었는데 일등석으로 옮기게 된 예를 들며 “더 큰 은혜를 사모할수록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부어 주신다.”고 설명했다.

글에서 오스틴은 이등석은 열등하고 일등석은 우등하다는 신분 서열제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위에서 설명했듯 일등주의는 적그리스도의 사상이다.

성경은 크리스천이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기술한다.

“높은 곳에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곳에..”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쪽으로..”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등등 개천에서 용 나려 애를 쓰는 삶이 아니라 도리어 일부러 져주고 섬기며 품는 삶을 살라고 강조하고 있다.

실제적인 예로 여러분이 일등석으로 옮기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고 해도 혹 비행기 안에 아픈 사람을 위해 자리를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형통을 경험하는 은혜받은 크리스천이다.

하지만 현대 크리스천들의 모습은 어떤가?

그들은 오스틴이 좋아하는 걸 그들도 똑같이 좋아한다.

교회 역시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각종 성공, 번영, 축복 집회 등의 현수막은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다.

연예인들, 사업가들 초청 간증집회는 천편일률적이다.

“내가 힘들었는데.. 새벽기도로.. 철야기도로.. 십일조로.. 주일성수로.. 봉사로.. 열심을 냈더니.. 사업이 회복됐다.” 라며 다른 성도들이 도전(?)을 받아 성공을 위한 새벽기도, 욕망을 위한 철야기도, 하나님과의 돈놀이하는 식의 십일조에 매진하게 한다.

그 결과 성도들은 어느새 기도를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수단이자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쓰레기로 만들어 버렸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처음 언급했던 등에 자녀의 이름을 붙이고 “주여! 주여! 주여!”를 외치는 처참한 열매다.

성경적인 형통은 내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형통은 내 것을 내어놓는 것이다.

성경적인 형통은 내 것을 나누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보라.

그들은 제 것을 조금도 자신의 것이라 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불과 물속에 던져지는 고난 가운데도 끝까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형통의 복을 받았다.

사자의 밥이 되는 순간에도 웃으며 찬송하는 복을 누렸다.

콜로세움에서 동료 성도가 사자에게 물어뜯기는 장면을 보면서도 손뼉을 쳐주며 “천국에서 보세~” 라고 손 흔드는 죽음을 초월한 믿음의 복을 받았다.

그렇다. 그들은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진정한 형통이 무엇인지 자신들의 뜨거운 피를 흘려 생생하게 입증해줬다.

형통은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 승리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내 등을 빌려줘 밟고 올라가라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형통의 본질을 너무나 잘 드러낸 중 열매 중의 열매다.

이 시간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마음속에 새겨지길 원한다.

그 희생의 십자가..

그 아픔의 십자가..

그 낮아짐의 십자가..

그.. 형통의.. 십자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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