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힘 53페이지에 오스틴이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나온다.

여기서 저자는 주차할 공간이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주차할 공간이 생겼다며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항상 나를 따라다닌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작은 곳에서조차도 항상 형통으로 이끈다는 의미로 형통은 곧 하나님의 은혜라는 방정식을 도입했다.

매우 위험한 논리며 심각한 일반화의 오류다.

우선 주차공간을 찾은 것만으로도 은혜를 말한다면 삶에서 일어나는 약간 안 좋은 일들, 가령 다음에는 주차공간이 없다거나. 자동차 키를 분실했다거나. 등등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가볍게 얼굴을 찡그리게 되는 일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건이 된다.

논리적으로 그렇게 귀결된다.

따라서 매사에 원하는 것들이 뻥뻥 뚫리는 “뚫어뻥”이 되는 삶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삶이라고 성급히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꼭 형통에만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 주위에는 열심히 충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삶이 녹록하지 못한 이들이 있다.

아주 많다. 그럼 그런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인가?

성경도 오스틴의 은혜관이 잘못됐다는 점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요셉과 보디발 장군 아내의 이야기를 크리스천이라면 다들 아시리라 본다.

장군의 아내가 수차례 요셉을 유혹했다. 요셉은 “내가 어찌 하나님께 득죄할 수 있을까?”라며 그녀의 유혹을 뿌리쳤다.

요셉은 그럼에도 그녀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다.

여기서 만약 오스틴의 은혜관을 적용하면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이 해당 사건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확인해보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39장

19 주인이 그 아내가 자기에게 고하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23절에 특히 주목하길 바란다.

요셉은 모함을 당해 옥에 갇혔다.

해당 사건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셨고 더불어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스틴은 말한다. “주차할 공간이 생겼고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날 따라다니기 때문이다.”라고..

성경은 말한다. “모함을 당하고 옥에 갇혔다.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하고 그를 형통케 하셨기 때문이다.”라고..

여기서 우리는 오스틴이 생각하는 형통이 성경적으로 매우 잘못된 사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죄를 이기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삶을 뜻한다.

다시 말해 삶에서 원하는 것을 이루는 삶이 형통이 아니라 비록 삶에서는 억울함을 당해도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키며 사는 삶이 진정한 형통의 본질이다.

바울과 실라의 이야기도 확인해보자.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 옥에 갇혔다.

그럼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인가.

분명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바울과 실라는 주를 위해 충성했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들에게 좋은 대접을 받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은혜 받은 자가 경험해야 할 자연스러운 절차다.

그러나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를 한 번 보라.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혔다.

매를 맞았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그들은 찬송하고 기도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은혜와 형통의 본질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의 본질은 단순히 삶이 고속도로처럼 뻥 뚫리는 것이 아님을 한국교회는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오히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병 낫기를 위해 기도했어도 여전히 병으로 고통할 때도..

집 나간 아내가 들어오지 않아 외로울 때도..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몽땅 날렸을 때도..

어떤 환경에서도 하늘을 소망하고 하나님이 계신 것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

그가 진정한 복의 사람이며 형통의 주인이고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은 자라는 걸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필자는 일전에 다닌 회사에서 급여가 다섯 달째 나오지 않아 한때 매우 궁핍한 삶을 산 적이 있다.

심지어 아침과 점심 두 끼를 굶어야 했을 정도로 궁핍했었다.

그때 필자는 “제게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것이면 족합니다. 하나님 앞으로도 더 굶으라면 굶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드린 적이 있다.

그 고백을 마쳤을 때 가슴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감사할 수 있는 입술이 내게 있었다는 점이 지금도 필자는 행복하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은혜다. 당시 필자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었음이 분명하다.

조엘오스틴 같은 사람들에게 세뇌된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은혜의 개념은 곧 형통일지 모른다.

주차공간이 생기는 것처럼 작은 부분에서도 자신들의 욕심이 만족을 얻는 삶이 형통이고 은혜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거듭 반복하지만 그런 생각은 참으로 안타깝고 허무한 믿음이다.

형통은 복이 아니다. 적어도 삶이 뻥뚫리는 삶을 복이라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가난도 저주가 아니다.

병 든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삶은 아니다.

잘 풀리지 않는 것도 은혜를 못 받은 것이 아니다.

일이 잘되든 안 되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형통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 인생사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희로애락 모든 일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반드시 있다.

이를 믿고 고백하며 감사한다면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중이라고 말해야 한다.

오스틴처럼 작은 일에도 형통해야 은혜가 그 사람을 따라다닌다고 말하지 마라.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싸구려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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