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연재]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 뒤집어 보기

[1부] 긍정의 힘에는 긍정이 없다!

긍정의 힘은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당신을
도와주실 거라고 말한다.

이것이 핵심 주제라고 책에서도 말하고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칭찬하는 내용이다.

해서 혹자는 왜 좋은 책을 비난하느냐며 되레 필자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필자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분이 나를 도와주신다는 사실은 조금도 의심 없이 믿는다. 아니 믿는 것을 뛰어넘어 간절히 기대한다.

가끔은 기도원에서 떼굴떼굴 굴러가며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자기계발을 강의하는 전문가로서 ‘긍정의 힘’의 핵심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다.”라는 점이 아니라는 데 ‘올인’할 수 있다.

긍정의 힘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주체는 “나”이다.

성령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다. 바로 “나”, “너” 그리고 “우리”라는 인간이다.

물론 조엘 오스틴 목사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붙여 사실을 감추고 있다.

오직 믿음만 있으면 내가, 당신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돕는 손길을 경험할 수 있다는 주장만 되풀이한다.

그의 논리는 단순하다. 당신의 믿음이 하나님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이끌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믿음에 세상은 없다는 점이다.

성경은 세상과 짝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거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믿습니다”를 강하게 해서 비록 소나무 뿌리를 뽑는다고 해도 간절히 바라는 믿음이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으신다.

이는 유치원 나이의 아이가 칼을 원한다고 부모로서 칼을 사 줄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처럼 바라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조엘 오스틴은 말하지 않는다. 그저 그는 말한다.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

성경과 반대되는 가르침이다.

조엘 오스틴이 가르치는 믿음의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가 긍정의 힘에서 이야기하는 “나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이끌어서 얻어내는 것 중 대다수가 ‘나의 번영’, ‘나의 부’, ‘나의 건강’ ‘나의 복’, ‘내가 꿈꾸는 비전을 이루는 것’ 등 오직 ‘나’라는 개인주의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결국, 조엘 오스틴은 세상을 좀 더 누리며 즐길 수 있는 방법으로 믿음을 수단으로 사용하라고 권하고 있는 셈이다.

믿음을 수단으로 쓴다라..

성경은 크리스천이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강조하고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

믿음은 크리스천의 전부지 수단이 아니다.

더구나 크리스천의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힘이고 세상과 짝하지 않고 삶을 사는 능력이다.

하지만 오스틴은 믿음을 수단으로 바꾼 것도 모자라 도리어 믿음을 세상과 짝하는 매우 유용한 죄악의 통로로 전락시켰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 땅에서 잘 살게 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 지시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세상과 짝하는 것이 악한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신다.

마태복음 16장 23절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지 못 하도록 막는 베드로에게 그분은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구절이 나온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이 말의 전후를 잘 생각해보면 사람의 일이 곧 사탄의 일이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얻으려고 하는 것들, 나의 번영, 나의 부, 나의 복 등 나의, 나의, 나의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일인가.

아니면 사람의 일인가.

냉정하게 스스로 평가해보았으면 한다.

만약, 그것이 사람의 일이라면 그 사상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가져다 붙이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을 끌어다 쓴다 해도 이는 양의 탈을 쓴 이리의 유혹임이 틀림없다.

긍정의 힘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관심은 거의 없다. 아니 아예 찾을 수가 없다.

있는 거라곤 오로지 당신의 뜻이 마치 하나님이 당신에게 바라시는 일처럼 표현된 사기술만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당연히 독자들은 기분이 좋을 것이다. 내 뜻과 내가 원하는 것들이 모두 이루어진다는데 기분 나쁠 사람은 한 명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면 당신은 죽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당신은 산다고..

실제로도 그렇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든 얻은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쉬이 찾지 않는다.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구원’은 요원한 일일 수밖에 없다.

성경에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양식을 잔뜩 쌓아놓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부자는 “우와! 내게 양식이 이렇게 많으니까. 내일은 뭐 하고 그 후에는 뭐해야지. 너무나 행복해”라고 말하곤 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 너 그거 아무리 많아도 좋아하면 안 돼. 내가 오늘 밤에 널 부르면 그거 다 놓고 와야 하거든..”

그렇다. 참된 신앙은 이처럼 이 땅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영원한 하늘의 것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다.

지금 긍정의 힘은 참된 신앙의 반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당신의 성공을 이룰 수 있는지, 당신의 재정이 풍족해질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

등등 오직 이 땅에서의 성공과 번영에만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메시지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왜곡된 신앙관을 갖도록 부추기는 것으로 대단히 위험한 사상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욕을 먹는 이유도 실상은 성도들이 하늘의 것보다는 이 땅의 것에 착념하여 필연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따라서 긍정의 힘은 기독교를 개독교를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하는 책이라 하겠다.

회복해야 한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것이지 나의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라는 인간 속에는 깊은 악이 존재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의 생각은 선하지 않으며 인간의 뜻은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

아마도 우리의 뜻이 많이 이루어지면 질수록 세상은 더 큰 악과 혼란으로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성경은 항상 강조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마태복음 6장 33절 -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 주기도문

긍정의 힘을 3번만 읽어보라.

그럼 당신은 하나님이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의 거인처럼 보일 것이다.

긍정의 힘을 5번만 읽어보라.

그럼 당신은 하나님이 마치 당신의 수발을 들어주는 하인처럼 보일 것이다.

긍정의 힘을 10번만 읽어보라.

그럼 당신은 하나님이 마치 당신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노예처럼 보일 것이다.

긍정의 힘에는 긍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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