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 15대 대통령 김대중 서거

 


[조은뉴스=홍성룡 기자]   오늘 18일, 오후 1시 43분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거목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박창일 세브란스병원 의료원장은 "오후 1시 43분 김대중 전대통령이 다발성장기부전으로 심장이 멈춰 서거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박 의료원장은 "당초 폐렴으로 입원했지만 치료 과정에서 급성호흡곤란증후군과 폐색전증으로 악화됐으며, 이날 다발성장기부전으로 사망하게 됐다"며 "심폐소생술은 의미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용히 보내드렸다"고 설명했다.

지난주 악화됐던 병세가 최근 안정세를 유지했으나 어제 오후부터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오늘 파란만장한 인동초(忍冬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한편,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18일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임시빈소는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영안실 특1호실에 마련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金雲植)과 어머니 장수금(張守錦)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아호는 후광(後廣)이다.

목포 상업학교를 졸업 후, 목포상선회사, 목포일보와 목포해운회사 사장을 거쳐 강원도 인제에서 5대 민의원 보궐선거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5.16 쿠데타로 국회의원 선서조차 하지 못한 불운을 겪었다.

이후, 63년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돼 대변인을 거쳤으며 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71년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46%를 득표했으나 박정희 후보에 밀려 낙선됐었다.

1973년에는 해외에서 유신반대활동을 전개하던 중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납치 당해 수장될 위기를 극적으로 넘겨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그 이후 가택연금을 당해 칩거하면서도 재야 반유신 투쟁의 결집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적극참여 했으며 선거법과 긴급조치위반 등으로 투옥, 수감과 단식투쟁, 자택연금, 사면을 반복하며 숱한 역경을 겪었다.

80년 광주민주화 운동의 배후로 지목돼 같은 해 12월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국제적 구명여론에 힘입어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었고 형 집행정지로 미국으로 망명했다. 1982년 주위의 반대와 암살을 무릅쓰고 귀국해 김영삼씨와 야권통합을 합의하고 민추협 공동의장직을 수행했다.

1985년에는 그의 유명한 저서 대중경제론 ‘행동하는 양심으로’를 출간했으며 1987 사면 복권돼, 그 해 평화민주당 13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노태우 후보에게 패배했다.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김영삼 후보에게 고배를 마신 후 정계 은퇴했으며 1995년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 국민회의를 창당,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고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2000년에는 ‘햇볕정책’으로 대변되는 대북정책으로 분단 55년 만에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 내, 남북공동선언 발표하였으며 그 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후광(後廣)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 민주주의의 초석이며 민주화의 대변자로 불려진다. 한국 최초의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평화적 한반도 통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한 네티즌은 “숱한 역경과 고난을 겪었던 그는 가장 위대한 한국정치지도자였다”고 말하고 “그 분의 서거를 계기로 동서화해는 물론 남북 관계개선으로 통일을 앞당겨 그 유지를 받들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른 네티즌은 “민주화의 큰 별이 졌다”면서 “추모집회를 통해 위대한 정치지도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의 슬픔을 나누고 명복을 빌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부인 이희호 여사와 홍일, 홍업, 홍걸 3형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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