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조금씩 알고 또 알아갈 뿐(漸修漸修:점수점수)입니다.”

원로 철학자는 “갑작스러운 깨달음(頓悟:돈오)은 없다”고 했다. “돈오는 지웠다”며 “한꺼번에 깨우치는 것은 없다”고도 말했다. “설사 있다고 해도 지적으로 자만해지고 인간을 오만하게 만든다”며 대신 “한번 닦은 거울을 매일 닦고 또 닦아야 하듯, 죽을 때까지 하루하루 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평생 철학 연구에만 매진해 온 한국의 대표적 철학자인 강영계 건국대 교수는 6년여 만에 강의실에서 마주 앉은 학부생들에게 “행정적 나이로 정년퇴임을 했지만 인생과 학문에 있어 아직도 첫걸음”이라며 “오늘이 또 다른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 ‘불각(不覺:알지 못함)’에서 ‘시각(始覺)하면(알기 시작하면) 죽기 살기로 제대로 알려 하고(本覺:본각)하고, 그래서 진짜 알게 되면 될수록 ‘묘각(妙覺)’”이며 “묘하니까 계속 알아보려고 한다”고 했다. 너무 욕심 내지 말고 조금씩 조금씩 가다보면 나아진다는 말에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5일 오후 건국대 산학협동관에서 열린 강영계 교수의 정년퇴임 기념 철학특강에는 교수와 학부생, 대학원생, 동문과 학계인사 등 100여명이 참석해 철학 대가의 ‘변명’을 듣고, 질의 답변을 통해 인간의 삶과 학문, 철학과 한국 사회에 대한 궁금증을 풀었다.

그는 명예교수라는 행정적 표현 자체가 어색할 정도로 개인의 삶과 사회의 6가지의 주제인 ▲구체적 현실, ▲방황, ▲불변의 진리?, ▲비판· 창조· 자유? ▲漸修漸修(점수점수), ▲개성과 공동체의식?에 대해 동서고금의 다양한 경험과 사례를 들어가며 철학을 이야기 했다.

이날 철학 특강은 강 교수가 논문집 봉정과 정년퇴임 기념식 등 통상적인 제자들의 퇴임 행사 제안을 고사하고, 명강의로 소문난 강 교수의 철학 강의에 목마른 학부 학생들을 위한 6년 만의 철학 강의 요청을 강 교수가 받아들여 이뤄졌다.

건국대 부총장 재직과 독일 프랑스 교환교수, 연구년 등으로 몇년간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나지 못한 ‘미안함’이 묻어나는 그의 강의에는 철학과 인문학 전공 학생은 물론 수의과대와 동물생명과학대 등 자연과학 전공 학생들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얼마 전 처음 다녀온 건국대 인근 자양동 골목시장 이야기로 ‘변명’을 시작한 강 교수는 “평생 지척에 이렇게 좋은 시장이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30년을 등잔 밑이 어둡게 살았다”며 “1시간 넘게 시장을 걸으며 ‘도대체 넌 뭐 아는 게 있니’라는 질타를 수없이 했다”고털어놓았다. 그러면서 “과거 미래 보다도 ‘구체적 현실’이 가장 중요하다”며 “구체적 현실의 바탕 위에 지금부터 시작하라”고 강조했다.

강 교수는 ‘비판 창조 자유’라는 철학의 방법론을 소개하면서 “철학은 구체적 현실을 직접 종합 분석 비판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며, 현실에서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미래 지향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현실적 감각과 체험을 통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등 모든 학문의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철학이라며 “물리 철학, 역사철학, 과학철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철학이며, 이 기본적인 것(철학)을 결여한 학문은 발전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강 교수는 “역사적 견해에서 보면 인문학과 철학의 위기는 당연한 것”이라면서도 “문화적 역사적 존재인 인간에게 인문학과 철학이라는 정신적 바탕이 없으면 (한 국가, 한 공동체의) 문명이 지속될 수 없는 만큼 정부와 대학의 지원과 육성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철학 원서를 찾아 주린 배를 움켜쥐고 청계천 책방을 헤매던 청년 시절의 철학 공부를 회고한 강 교수는 “일생이 방황”이라고 했다. “이것도 맞는 것 같고 저것도 옳은 것 같고, 하나 하나 알아가면서 덜 방황할 뿐 죽을 때까지 고뇌하고 방황한다.”

그러면서 강 교수는 ‘불변의 진리’라는 것은 “희망사항이 아닐까” 하는 것이 솔직한 이야기라고 털어놓았다. “세상 만물 모르는게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철학은 솔직하지 못하거나 희망사항과 구체적 사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우주만물과 모든 역사를 아우르는 영원불변의 진리를 이야기하는 철학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일침을 놓았다.

‘영원 불변의 진리’라는 희망사항에서 자유로워진 강 교수의 특강은 “조금씩 하나씩, 작은 것부터, 처음부터 구체적 현실에서 시작해야한다”는 漸修漸修(점수점수)론으로 귀결됐다. 한꺼번에 확 깨닫는 것이 없는 만큼 닦고 또 닦고 죽을 때까지 끊임 없이 닦야야 한다.

구체적 현실에 바탕한 철학은 개성과 공동체 의식의 갈등과 조화에 관한 강의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우리가 이기면 상대방이 지고, 상대가 살면 우리가 죽는 ‘현실’이 보여주듯 개성과 공동체라는 서로 다른 가치가 조화롭게 공존하고 부분과 전체를 조화롭게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갈등과 조화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으며 갈등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개성과 공동체는 서로 갈등하면서 극복해가고 익숙해지고 배워가는 것이다.”

과학-의학의 발달과 유전자 변형 등에 대한 철학적 물음에 대해 강 교수는 “자연이 인간에게 허용한 것 이상으로 ‘완전하고 절대적인 것’에 대한 환상을 너무 추구해 사람이 못된 방향으로 왔다” 고 지적하고 “이런 측면에서 단기적으로는 나는 낙천주의자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염세주의자”라며 인류가 직면한 자원부족과 전쟁위험 등을 경계했다.

이날 강의에서 강 교수는 특히 “만물은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관점과 차원과 세계와 결과가 각기 다르다”며 이런 측면에서 “나는 다원론자”라고 소개했다. 인생과 학문에서 이제 첫걸음을 땐다는 이 원로 다원론자는 “배우기 시작하니 길거리의 먼지 하나 풀 하나 나무 하나가 모두 스승 아닌 것이 없더라”고 했다.

‘하루살이’ 같은 인생에서 하루하루가 귀하고 소중하다며 “순간순간을 보람 있게 만들어라”는 원로 철학자의 6년만의 ‘변명’은 청명한 하늘처럼 환한 박수와 함께 후학들의 가슴 속에 스며들었다.

■  강영계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국대 문과대학장, 부총장을 역임했으며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 프랑스 슈트라스부르대학 교환교수를 지냈다. 현재 중국 서안의 서북대학교 객좌교수이며 한국니체학회 회장이다.

평생 철학 연구를 통해 수많은 연구논문은 물론 지금까지 50여권의 저서와 20여권의 번역서를 출간했다. 철학 전공자나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저서 1권쯤은 읽었을 정도. 주요저서로 《청소년을 위한 철학 에세이》《바보와 천재》《니체와 정신분석학》《헤겔》《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이야기》《기독교 신비주의 철학》 등이 있다.

최근에도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등 20세기의 혁명적 사상가 3명의 삶을 따라가며 그들의 사상이 어떤 맥락에서 형성됐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기 쉽게 설명한‘철학의 끌림’(멘토프레스)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건국대 철학과 김성민 교수는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한국철학, 고대철학에서 현대철학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전후 좌우 종횡으로 엮어서 철학적 편력과 천착을 한 유일한 학자”라며 “이를 통해 인간을 어떻게 규명하고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철학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노력해온 한국의 대표적 철학자”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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