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조은뉴스=박삼진 기자]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에 전해져 내려오는 신라시대 왕릉급 무덤의 주인공을 제대로 밝혀 주는 학술서적, 『신라 왕릉 연구』가 학연문화사에서 나왔다.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이자 대학원장 이었던 이근직 교수는 지난해 6월, 출근길에 몸담았던 대학 정문 앞에서 교통사고로 고인이 되었기에 이 책은 그의 유고집이다.

『신라 왕릉 연구』는 저자가 박사학위논문이었던 「신라 왕릉의 기원과 변천」을 단행본으로 출판하고자 생전에 수정과 보완을 거듭하여 편집까지 완료된 원고를 PC에 남겨 두었기에 유족과 함께 공부했던 동학들이 서둘러 출판할 수 있었다.

신라천년의 수도인 경주는 신라가 992년간 존속하면서 수많은 능묘(陵墓)유적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시조 혁거세거서간부터 경애왕까지 55명의 왕과 그 수보다 더 많았을 왕비가 경주에서 장례를 치렀으며, 이 중에서 화장(火葬)하여 산골(散骨)한 몇몇 왕과 왕비를 제외한 대부분의 왕과 왕비, 그리고 수많은 왕공귀족(王公貴族)들이 경주땅에 무덤을 만들었다.

이러한 신라시대 무덤의 외형과 규모, 내부에서 확인되는 유구와 유물들은 우리역사의 빈 공간을 메워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당시 최고 지배자인 왕(비)릉은 조영당시 신라왕실이 가진 정치사회적인 위치와 사상이 함축되어 표현된 신성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신라가 쇠망한 이후 일천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능묘는 인위적, 자연적인 훼손도 있었지만 전승(傳承) 과정에서 대부분의 능묘가 주인공을 잃어버렸거나 잘못 전승되어 주인공이 바뀌어 버린데 있다. 이처럼 신라시대의 상황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풀고자 하는 연구는 신라 왕릉의 수에 비해서는 미진했다.

이러한 숙제를 풀고자 몇몇 학자들이 연구를 시도했지만 부분적인 검토에 그쳤을 뿐 구체적이고도 치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라 왕릉 연구』는 지금까지 학계가 신라사 및 신라고고학 연구과정에서 난제로 여겨왔던 신라 왕릉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신라 왕릉의 기원에서 발전, 쇠퇴, 종말의 전 과정을 치밀하게 분석하였으며, 이를 통해 그동안 잘못 알려져 오던 왕릉들의 주인공을 제대로 꿰어 맞추는 성과를 낳았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저자가 경주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신라 수도 경주의 산천지리와 이를 두고 일어날 수 있는 공간상의 정황을 꿰뚫고 있었으며, 지난 20여 년간 각종 문헌기록을 뒤지고 현장을 답사하면서 무덤의 입지조건과 규모, 양식의 변천과정을 살핀 결과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를 고고학, 미술사, 왕릉 조영에 반영된 정치, 사회, 지리, 사상, 예술적인 측면 등 모든 상시의 상황을 신라인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통찰력이 고스란히 이 책에 담겨있다.

『신라왕릉연구』에 의하면 현재 명칭이 붙여진 신라 왕릉 가운데 문화재지정명칭, 문헌기록상의 위치,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천되는 무덤양식 등 3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진짜 왕릉은 제27대 선덕여왕릉, 제29대 무열왕릉, 제30대 문무왕릉, 제33대 성덕왕릉, 제38대 원성왕릉, 제41대 헌덕왕릉, 제42대 흥덕왕릉 등 7기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주인공을 잃어버렸거나 잘못 알려져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저자는 우선 신라 상고기(上古期)의 왕릉으로 전승되어오던 신라 오릉은 5세기 이후의 적석목곽분, 제4대 탈해왕릉, 제6대 지마왕릉, 제8대 아달라왕릉은 통일기의 횡혈식석실분, 제13대 미추왕릉은 5세기 이후의 적석목곽분으로, 제17대 나물왕릉은 7세기의 횡혈식석실분으로서 상고기의 왕릉으로 지정된 고분들 중 제7대 일성왕릉을 제외한 분묘들은 왕릉과는 무관한 고분으로 보았다.

신라 중고기(中古期) 왕릉으로 전승되어오던 제23대 법흥왕릉, 제24대 진흥왕릉, 제25대 진지왕릉은 규모와 형식으로 보아 왕릉이 아닌 왕공귀족들의 묘로 해석하였으며, 제26대 진평왕릉은 제31대 신문왕릉으로, 제28대 진덕왕릉은 제45대 신무왕릉으로 비정하였다. 한편 무열왕릉 뒤쪽의 서악동고분군을 중고기 왕릉으로 비정(比定)하였는데 4호분을 법흥왕릉, 3호분을 법흥왕비 보도부인릉, 2호분을 진흥왕릉, 1호분을 진지왕릉으로 비정하였다.

신라 중대(中代) 왕릉 중에는 제31대 신문왕릉은 제32대 효소왕릉으로, 제32대 효소왕릉은 왕릉이 아닌 성덕왕릉에 딸린 배장묘로, 제35대 경덕왕릉은 제39대 소성왕릉으로 비정하였다. 한편 제52대 효공왕릉을 문무왕비 자의왕후릉으로, 황복사지 동편 폐릉을 효성왕비 혜명부인릉으로, 김유신묘를 제35대 경덕왕릉으로, 김인문묘를 김유신묘로 비정하였다.

신라 하대(下代) 왕릉 중에는 제35대 경덕왕릉을 제39대 소성왕릉으로 제44대 민애왕릉을 제40대 애장왕릉으로, 능지탑의 석물을 제43대 희강왕릉의 것으로, 구정동 방형분을 제44대 민애왕릉으로, 제28대 진덕왕릉을 제45대 신무왕릉으로, 제49대 헌강왕릉과 제50대 정강왕릉을 제46대 문성왕릉과 제47대 헌안왕릉으로, 제7대 일성왕릉을 제52대 효공왕릉으로 비정하고, 제45대 신무왕릉, 제46대 문성왕릉, 제47대 헌안왕릉, 제53대 신덕왕릉, 제54대 경명왕릉, 제55대 경애왕릉은 왕릉이 아닌 왕공귀족의 분묘로 보았다.

이렇게 볼 때, 현재 명칭이 붙여진 경주의 신라 왕릉은 거의 대부분 남의 이름으로 문패를 달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속사정이 있기에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은 보였어도 조심스럽게 접근하였으며, 결국은 적당히 비켜가는 편에 서 왔다. 저자도 수년전에 이와 관련한 연구를 발표하였다가 신라왕성(新羅王姓)인 박,석,김씨 문중으로부터 심한 시달림을 받은 일화가 있다.

이 책은 고분(古墳)이 동산처럼 무더기로 솟아있는 경주 금척 마을에서 태어난 저자가 어릴 때부터 남달리 고분과 왕릉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그의 연구일생이 담긴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고인이 생전에 자신이 배우고 익힌 지식을 지역사회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공부하고자 만든 연구모임인 경주학연구원(慶州學硏究院)의 “경주학연구총서 2”호로 발간하였으며, 경주학연구원에서는 앞으로도 고인이 각종 학술지 등에 실었던 수많은 논문들을 종류별로 묶어서 제2, 제3의 유고집을 출간할 계획이다.

한편 서평은 저자의 대학원 스승이었던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썼으며, 출판을 기념하는 행사가 경주학연구원 주관으로 2월 26일(일) 11시 경주 현대호텔 에머랄드 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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