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조은뉴스=온라인뉴스팀]  “아직 해야 할 게 너무 너무 많아요.”

앳된 모습의 소녀가 커피숍으로 들어서며 부산을 떨었다. 작은 키의 가녀린 소녀가 ‘인권’을 위해 해낸 일을 생각하니 새삼 놀랍다. ‘살색‘ 표현이 비인권이라고 생각한 한 소녀가 굴지의 기업들로부터 시정 의사를 받아냈다고 한다.

성남시 분당에 있는 대안학교인 이우고등학교에 다니는 김민영양(18)이 말하는 인권 이야기를 들어봤다.


살색은 잘못된 표현이라고요?
‘살색’이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인권면에서 살펴봤을 때 올바르지 못한 표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살색은 황인을 뜻하는 거지요.

우리나라에선 2002년 11월부터 크레파스에서 살색 표현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헌법 11조에 따라 ‘살색’이 평등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국가인권위의 권고로 기술표준원에선 ‘살색’ 대신 ‘연주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고요?
연주황색이 어린이들이 쓰기에는 어려운 말이고, 순우리말로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왔어요. 그러다가 2004년 8월쯤 한 자리에 모인 친척들과 살색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가 13살이었는데, 사촌들과 얘기를 하다가 ‘연주황색’ 표현이 너무 어렵다고 의견을 모았어요.

그래서 사촌들과 함께 국가인권위에 연주황색 표현을 ‘살구색’으로 순화할 것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냈어요. 어려운 한자어보다 과일색을 쓰면 어린이들이 쓰기도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진정서의 피해자란에는 ‘대한민국 어린이들’이라고 적었어요. ‘연주황색’은 어린이들이 쓰는 크레파스, 물감색으로 들어가기엔 이해가 어려울 것”이라는 내용의 진정서였습니다.

2004년 8월에 진정서를 제출했는데요, 국가인권위측에선 9월 3일부터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어린이들이 와서 진정서를 제출했으니, 인권위 측에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기각 결정이 났다고 우편으로 왔기에 실망이 컸죠.

그런데 2005년 2월 12일부터 2월 24일까지 인권위에서 다시 심의를 했다고 해요. 2005년 5월, 결국에는 연주황색을 ‘살구색’으로 바꾸도록 기술표준위에 권고하겠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기업과 언론사에도 시정 요구를 하셨다고요?
살구색 표현을 쓰게 된 것은 이미 2005년의 일이지만 많은 언론과 업체에서 여전히 ‘살색’ 표현을 하고 있었습니다. 언론사나 방송사에서 살색 관련 표현이 나올 때면 예의주시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변화가 없었습니다. 특히 바른 표현을 쓰는데 가장 먼저 앞장서야 할 언론사의 태도에는 실망도 했고요.

인권에 관심을 가진 고등학생들이 모여 만든'평화를 사랑하는 청소년 모임'(평사모) 회원들과 함께 국가인권위에 두 번째 진정서를 제출하기로 했습니다. 언론사와 기업체에서 살구색 표현을 사용하도록 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2002년 8월 1일자부터 2009년 8월 20일자까지 7년치 기사를 검색해봤어요. 중앙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경제 등의 언론사에서 살색 표현을 거리낌 없이 남발하고 있었습니다. 중앙일보는 무려 162건이나 되더군요. 대형마트를 둘러보다 스타킹, 의류 등의 제품에도 여전히 살색 표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요.

조사를 바탕으로 2009년 8월 25일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했고, 인권위에서는 10월부터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올해 5월에 18개 업체로부터 시정하겠다는 회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롯데마트에선 국가인권위 뿐만 아니라 제게도 우편을 보내는 성의 있는 자세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잘못 표기된 스타킹, 란제리 상품을 모두 회수해살구색으로 바꿀 것”이라는 답신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발로 뛰며 노력한 덕분이었죠.

하지만 여전히 스타킹과 화장품 등에 ‘살색’을 사용하고 있어요. 진정 요구가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현실로 이어질 것은 앞으로 꾸준히 지켜봐야할 문제인 것 같아요. 스타킹의 경우만 하더라도 현재 공장에서 나온 제품들은 수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다 팔리기 전에는 고칠 수도 없다고 하니, 좀 더 기다려 봐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가족의 영향으로 인권에 관심을 가지셨다고요?
인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가족들의 영향이 가장 컸습니다.성남외국인노동자의집 대표인 김해성 목사가 아버지인데요, 어려서부터 이주 외국인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시는 아버지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아버지께선 2002년도 살색을 연주황색으로 바꾸도록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냈습니다. 헌법 제11조의 평등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하신 거죠. 이를 받아들인 국가인권위가 기술표준위원회에 살색 표현을 쓰지 말 것을 권고했고요.

어릴 때부터도 아버지가 운영하시던‘외국인노동자의 집’에 방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외국인들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리 없었죠.또래의 외국인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일상이었으니까요.그러다보니 외국인들과 다문화가정의 인권보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던 같아요.

또, ‘평화를 사랑하는 청소년들의 모임’ 창립 멤버인 친언니의 영향도 컸습니다. 2007년 8월 15일에는 언니 등 평사모 회원들과 함께 위안부 할머니 문제에 항의하고 사죄를 촉구하러 일본에 가기도 했습니다. 언니와 함께였기 때문에 인권보호 활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어요. 지금은 위안부 할머니 문제라든지, 아동 인권 등의 다른 인권문제들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름방학에는 무엇을 할 계획인가요?
위안부, 사형제 등의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아동 인권이 가장 큰 관심사고요. 사람이 사는 어떤 분야도 인권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에, 제가 할 일은 아직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부족하다고 느끼고요.

올해는 정말 정신없는 여름방학이 될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아우름'이라는 인권동아리의 회장을 맡고 있어 동아리 활동도 돌봐야 해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인권 교육도 펼칠 예정이거든요.

게다가 이번 8월에 열리는 청소년 모의유엔에서 의장직을 맡고 있어 바쁜 여름이 될 것 같아요. 청소년 모의유엔의 주제가 마침 ‘인권’이기 때문에 준비할 것도 많고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긴 하겠지만 인권을 위해서라면 감수해야죠. 오히려 인권에 대해 알리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요즘은 영어 스터디도 하고 있어요. 학업은 물론, 인권 문제에 있어서도 언어구사능력은 필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어가 자신 없었기 때문에 더욱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요. 아마도 정말 바쁜 여름방학이 될 것 같아요!

김민영양은 이제 곧 고3 수험생이 된다. 그녀는 “대안학교 이우고에 진학한 것은 입시보다 인권을 위해 활동하고 싶었고, 부모님들도 지지해 주셨기 때문”이라며 “인권 활동을 계속 지속하며 대학교에 진학해 좀 더 배움을 얻고 싶다”고 말했다.

똑 부러지는 말투와 겸손한 태도가 인상적이었던 인권소녀를 만났더니, 인권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 '삶'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김민영양이 인권을 위해 멋진 활약을 펼칠 것을 기대해 본다. [정책포털 정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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