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셋은 신이 제게 맡긴 보물이죠”
부와 명예가 보장되는 최정상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면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2002년 세 아이와 함께 캐나다로 떠났던 개그우먼 이성미(51)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러 방송국을 오가며 바쁘게 활동하던 그 당시, 모든 일을 접고 캐나다행을 결정한 그에게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가면 나중에 복귀하기 힘들다”며 협박 반, 사정 반으로 붙잡았다. 하지만 그의 굳은 결심을 돌려놓진 못했다.
“큰아이 은기(21)가 그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유학 가기를 간절하게 원했어요. 처음에는 은기가 수재도 아니고 유학을 보낼 만큼 넉넉한 형편도 아니어서 단칼에 잘라버렸는데,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보니 아이 마음도 이해가 되더라고요. 하지만 아이를 혼자 보내는 건 내키지 않아 두 딸도 데리고 갔죠.”
큰아들을 먼저 보낸 후 은비(13)와 은별(9), 두 딸과 함께 뒤따라간 그는 언제 한국으로 돌아올지, 캐나다에서 어떤 일을 할지 아무런 계획도 미리 세워두지 않았다. 그저 캐나다에서는 일하는 바쁜 엄마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헌신하는 평범한 엄마로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자녀에게 헌신하는 평범한 엄마로 산 7년
결심한 대로 그의 하루는 온전히 아이들을 위해 쓰였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교회에 다녀오면 아침 7시. 그때부터 아침 식사 준비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준 뒤 집안 청소와 간식 준비까지 마치면 오전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점심에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이들 도시락을 학교로 날랐다.
“제가 어린 시절 엄마 없이 외롭게 자란 탓에, 엄마가 학교로 오는 아이들이 참 부러웠거든요. 캐나다에서는 원 없이 아이들 학교를 가봤어요. 아이들도 그때마다 무척 좋아했고요.”
또 하교 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오면 오후 3시. 아이들에게 간식 챙겨주고, 저녁 식사 준비를 하다 보면 어느새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 돌 듯 매일 규칙적인 생활이 반복되는 일상이 따분하진 않았냐고 물었더니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세 아이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었지만 그거야말로 제가 오랫동안 꿈꿔온 행복이었어요. 제법 엄마 노릇을 하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고요. 아이들이 ‘엄마’ 하고 부를 때 바로 대답할 수 있고, 무엇보다 사랑을 아낌없이 줄 수 있어서 좋았어요.”
한국에서 그는 엄마이기 이전에 얼굴이 명함인 유명인이다 보니 아이를 키우는 문제에서도 남의 눈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캐나다에서는 확실히 달라진 엄마의 모습을 보여줬다. 세 아이 모두 그에게 “엄마가 변했다”고 대놓고 말할 정도였다.
먼저 한국에서 아침마다 언성을 높여가며 아이들을 깨우던 습관부터 버렸다. 누워 있는 아이들을 꼭 안아주면서 귀에다 대고 “좋은 아침이야” 하고 속삭였다. 놀랍게도 큰소리를 칠 때보다 유연한 방법이 한결 효과적이었다.
“공부 잘하는 아이보다 인사 잘하는 아이, 인간다운 면모를 가진 사람이 더 훌륭하다”며 평소 아이들에게 강조해온 교육관도 마음껏 실행에 옮겼다. ‘숙제 해라’, ‘공부해라’, ‘말썽 피우지 마라’ 식의 일방적인 지시는 되도록이면 삼갔다. 여행 갈 행선지를 정하는 사소한 문제를 놓고도 아이들에게 먼저 의견을 구했다. 이처럼 그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아이들을 대하게 된 데는 큰아들 은기의 영향이 컸다.
“캐나다에서 지내는 동안 은기가 학교에서 사소한 다툼을 벌인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원인이 저에게 있었어요. 저한테 폐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제 딴에는 많이 참고 억누르면서 살았더라고요. 그러다 갑작스럽게 폭발한 거죠. 그때 깨달았어요. 나름대로는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운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게 ‘개그우먼 이성미의 자식’으로 키우고 있었다는 걸요.”
그날 저녁 은기는 “당장 나가라”고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엄마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의아해했다. 그러고 며칠 후 엄마가 보인 뜻밖의 행동에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은기 앞에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사죄했어요. ‘엄마가 너를 이성미의 아들로 커주길 바랐던 것 같다. 그게 너를 많이 힘들게 했구나. 엄마를 용서해다오’ 하고요.”
이후 변한 것은 이 씨만이 아니다. 한창 사춘기를 겪으며 엄마와 하루가 멀다고 다투던 은기는 엄마와 동생들을 먼저 배려하고 자신의 인생을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는 듬직한 아들로 새롭게 태어났다.
어느덧 대학생이 된 은기는 미국에서 독립해서 살고 있다. 자식들에게 “스무 살이 넘으면 해줄 것이 없으니 독립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며 살 수 있다”고 누누이 강조해온 엄마의 말에 은기도 공감한 것이다. 하지만 이 씨는 아들을 떼어놓고 귀국해야 했을 땐 잠시 마음이 약해졌다.
“남편이 일 년에 두 번씩 손님처럼 왔다가다 보니 아이들과의 관계가 점점 서먹해지더라고요. 아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게 내버려둘 수도 없었고요. 막상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려니 은기를 그냥 데려갈까 하는 유혹도 느꼈지만, 무엇이 아이를 위한 길인지 알기에 마음을 고쳐먹었죠.”
“아이들 사랑하고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
은기와 헤어지는 아쉬움을 이들 가족은 오붓한 이별 여행으로 대신했다. 그 여행은 낯선 땅에서 서로 의지하면서 하루하루 차곡차곡 쌓였던 가족 간의 정이 얼마나 크고 두터운지 느끼게 해준 시간이었다.
얼마 전 두 딸은 은기가 보낸 편지를 받아들고 가슴을 졸였다. “편지를 열어보면 오빠가 너무 보고 싶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도저히 뜯어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딸들에게는 “오빠에게 답장 써야지” 하고 담담하게 대꾸했지만 실은 그도 은기의 편지를 읽고 눈시울을 붉혔다.
7년여 만에 방송에 복귀했지만 이 씨는 여전히 ‘연예계 최고 동안(童顔)’을 유지하고 있다. 돌아오자마자 성우 안지환과 함께 TBS ‘9595쇼’의 진행을 맡으며 성공적인 방송 신고식을 치렀다. ‘9595쇼’는 그가 캐나다로 떠나기 전 탤런트 김성환과 10여 년간 진행한 프로그램. 앞으로 방송을 통해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국민파스’가 되고 싶다”는 그는 부모와 자식 간에 대화가 단절된 가족을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진짜 원하는 것은 명품 옷도, 좋은 집도 아니에요. 바로 사랑이에요. 평범한 엄마로 살면서 아이들을 사랑하고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어요. 함께할 수 있는 지금, 후회 없이 사랑하세요. 사랑을 받을 때보다 줄 때가 더 행복하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이승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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