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기 폭파범으로 몰렸던 김현희로부터의 충격적 편지 '공개'

김현희(金賢姬)는 한반도 분단사가 만들어 낸 또 하나의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는 1987년 1년 앞으로 박두한 88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훼방하려고 북한독재정권이 저지른 만행이었던 대한항공 858기 폭파의 2인조 폭파범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 공중폭파 사건으로 탑승했던 승객과 승무원 115명 전원이 사망했다. 폭탄이 설치된 858기가 기착했던 UAE 아부다비 공항에서 비행기를 내려서 도주를 시도했던 2인조 폭파범은 바레인 공항에서 체포되는 과정에서 남성 공범(김승일)은 음독자살했고 음독자살 시도에 실패한 김현희는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김현희는 이 폭파 만행의 공범으로 대법원에 의해 사형판결이 확정되었지만 서울에서 수사기관에게 사건의 전모를 진술함으로써 이 사건이 북한에 의하여 자행된 국가범죄였음을 입증하는 산 증인이 된데 대한 장공속죄(將功贖罪)의 차원에서 특별사면 처분을 받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더구나, 김현희는 그가 특수공작원으로 훈련을 받는 기간 중 만났던 납북 일본인 여성(일본 이름: 다구치 야에코ㆍ북한 이름: 리은혜)의 존재를 밝힘으로써 일본과 북한 사이에 납북일본인 문제를 새로운 외교 현안으로 부상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은 북한이 범행을 부인하는 가운데 국내의 친북ㆍ좌파 세력에 의한 끈질긴 조작 시비의 대상이 되었다. 이 와중에서 필자는 엉뚱한 일로 김현희 문제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것은 김현희가 1972년11월4일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공동위원장(이후락ㆍ李厚洛) 일행의 평양 방문 때 이들 일행이 탑승한 북한군 M18 헬리콥터가 평양 대동강 남쪽 역포의 간이 착륙장에 착륙했을 때 영접을 나왔던 화동(花童)의 하나로 바로 필자에게 꽃다발을 안겨주고 또 필자의 목에 붉은 스카프를 걸어준 소녀였음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김대중(金大中) 씨가 이끄는 좌파 정부가 출범한 이후 한 때는 필자 또한 좌파세력에 의해 858기 폭파사건 조작 시비의 입방아 질에 오르내리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노무현(盧武鉉) 정권 때는 국가정보원 안에 특히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의 조작되었다는 주장을 입증하는 것을 목적 중의 하나로 하는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가 내노라 하는 친북ㆍ좌파 인사들로 구성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작년 오히려 문제의 858기 폭파가 실재(實在)했을 뿐 아니라 북한의 지령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인정하는 내용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필자의 뇌리에서는 그것으로 이 사건이 사실상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필자의 희망이었을 뿐이었다. 엉뚱한 일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하순 어느 날 필자는 난 데 없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남자는 자신이 김현희의 남편이고 김현희가 필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있다면서 만나기를 희망했다.

필자는 그날 저녁 필자의 집 근처 한 허름한 한 식당에서 김현희의 남편을 만나 그로부터 김현희가 필자에게 쓴 장문의 편지를 받아 보게 되었다. 즉석에서 읽어본 김현희의 편지 내용은 한 마디로 충격적이었다.

좌파 정권 10년 동안에 이 나라의 정권기관과 TVㆍ방송 매체를 장악한 친북ㆍ좌파 세력들은 국가기관과 TVㆍ방송매체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김현희와 그의 가족에게 과거 이디 아민이 지배하던 우간다에서나 있었음직한 인권유린 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그들이 자행한 인권유린 행위를 통하여 그들이 달성하고자 했던 목적이 이 편지를 읽는 필자로 하여금 치를 떨게 만들었다. 그들은 김현희에게 “858기 폭파사건은 북한이 저지른 것이 아니라 남한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라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강요했었다.

더욱 분노를 금할 수 없는 것은 국정원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가 858기 폭파사건이 실재했던 사건이라는 결론을 내린 뒤에도 이들 친북ㆍ좌파 세력은 김현희를 괴롭히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들은 김현희에게 TV와 방송을 통해 “그러나 858기 폭파사건을 김정일(金正日)이 지시하지는 않았다”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할 것을 끈덕지게 강요했고 이를 감당하지 못한 김현희로 하여금 어린 아들딸과 함께 집을 버리고 동가숙ㆍ서가식(東家宿ㆍ西家食)의 유랑생활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김현희의 남편이 전해 주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들 가족은 ‘안전’에 대한 위협 때문에 전화마저 소유하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김현희의 처지에 대해서는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 여겨진다. 그러한 뜻에서 아래에 김현희가 필자에게 보낸 편지 전문을 소개한다.

읽는 분들이 이 글을 읽어 본 뒤 김현희로 하여금 더 이상 이 나라의 좌파 세력으로부터 이 같은 부당한 인권탄압을 당하지 않을뿐더러 그 동안 있었던 일과 관련하여 정의(正義)를 회복시켜 줄 수 있게 하는 방안을 함께 마련하는 데 동참해 주도록 간곡하게 호소한다.

김현희가 이동복 전 명지대 교수에게 보낸 편지 전문

이동복 북한 민주화포럼 상임대표님께

지난 여름은 정말 무더웠습니다. 시월의 끝자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완연한 가을의 기운을 느끼게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KAL 858기 폭파사건의 장본인인 김현희입니다. 저는 대표님을 1972년 11월 남북조절위 남측 사절단으로 평양에 오셨을 때 화동으로 참석하여 처음 뵈옵고, 서울에 와서는 대표님께서 안기부 특보로 계실 때 두 번째 뵈었습니다. 대표님과 저와는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기에 일찍이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여 송구스럽습니다.

저는 월간지나 인터넷을 통해 대표님께서 북한민주화를 위해 활동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최근 MBC ‘PD수첩’프로그램에서 방송한 광우병 사태와 관련하여 기자회견을 하시는 등 대표님의 소식을 접하고 있습니다.

- 편지를 쓰게 된 동기

제가 이곳 남한에서 정착하여 생활을 한지도 벌써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는 1997년 12월이 되어 그동안의 모든 사회활동을 완전히 접고 결혼하여 두 아이의 엄마로서 평범한 생활을 해왔습니다.

저는 저로 인해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유족들에게 심려를 끼치지 않으려고 세상과는 거리를 둔 채 하루하루를 참회하면서 조용히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5년 전인 2003년 경 친북성향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세상은 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KAL기 사건의 조작설과 음모론이 그 어느 시기 때보다 크게 제기되었고 MBC등 공영방송사들이 이에 편승하여 KAL기 사건의 실체를 부정적으로 방송하는 안타까운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저는 대표님께서 2003년 11월 MBC 교양제작국의 PD수첩 “16년간의 의혹, KAL기 폭파범 김현희의 진실” 프로그램의 최진용 책임 PD에게 보낸 편지를 읽은 사실이 있습니다.

최PD가 “장기영에게 꽃다발을 건네 준 소녀가 김현희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한 것에 대한 대표님의 정중한 반론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표님께서 2007년 10월 국정원 과거사위의 KAL기 사건 조사결과 발표에 대해 ‘晩時之歎(만시지탄)’의 성어로 대신하신 글을 읽었습니다.

저는 대표님께서 저와 KAL기 사건의 실체를 입증하시는데 많은 노력을 하시는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친북좌파들은 대표님의 증언을 거부하였고, 저는 그들로 부터는 지난 정권 내내 “가짜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비난을 받아야했고, 국정원 과거사위로부터는 십수차례의 조사 요구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MBC와 SBS 등 방송제작진들은 저의 집을 습격하고 촬영․방송하여 노출시키는가하면 국정원과 경찰당국은 저와 저의 가족을 추방하는 정말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추방되어 피난생활을 여지껏 해오고 있습니다.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고, 당사자인 제가 겪어야만 했던 많은 고초들과 실제 그 음모들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에 대한 저의 의견 등을 대표님께 소상히 말씀드리고 도움을 받고자 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 의혹의 사건들

2003년 10월이 되어 저의 신상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국정원의 모 직원으로부터 국정원 내부가 시끄러우니 외국으로 이민을 갈 것을 권고 받았습니다. 담당직원으로부터는 전화로 수십차례에 걸쳐 KAL기 사건에 관한 질문들을 받았습니다. 그는 저에게 뼈아픈 옛 기억들을 상기시켰습니다. 저와 관련해서 국정원 내부에 어떤 일이 전개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담당 경찰간부로부터 2년 정도 타지역에 거주해 줄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해 10월 하순경, 저의 집 현관에는 미심쩍은 두 종류의 외국산 우유가 배달되어 있었고, 그 배달물은 며칠 동안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시기 KBS 취재기자들이 저의 거주지 주변을 며칠 동안 대개하면서 취재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국정원으로부터 그들의 취재활동을 사전에 통보받은 바가 없었습니다.

그해 11월 초순경, 천주교 사제단 115명이, 일주일 뒤에는 천주교 신부 202명이 정동 성프란체스코 회관에서 KAL기사건 조작의혹을 제기하면서 전면 재조사와 당시 안무혁 부장, 이상연 차장, 정형근 수사국장 등 수사책임자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16년 전의 사건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주변 상황으로 마음이 매우 어수선한 시기에 국정원 담당관으로부터 MBC PD수첩 프로그램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재차 지휘부에서 이미 결정한 사항이니 그 지시에 따를 것을 강요해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지시를 완강히 거부하였고 이것이 큰 화근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1월 중순경, 이 지시 거부 때문에 저의 남편이 호출당하여 경기도 분당 모 식당에서 국정원 담당간부와 직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저의 공개출연은 요구하지 않겠지만, 대신 연말에 청사 내에서 천주교 신부들과 설명회를 가지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저에 대한 공개 문제는 이것으로 마무리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남편이 담당간부를 만나고 있는 바로 그 시각에, 밤을 틈타 카메라를 멘 기자 여러 명이 저의 집을 습격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다름아닌 MBC PD수첩의 취재기자들이었습니다. 저로서는 몹시 긴장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정원이 앞에서는 태연히 저에게 거짓 약속을 하면서까지 뒤에서 공격하는 데에는 그들의 사업계획이 꽤나 절박하였나 봅니다.

MBC 기자들에게 습격당한 다음날 새벽 저는 그들에게 계속해서 시달릴 것을 생각하여 담당경찰들과 함께 그들의 눈을 피해 어린 자식들을 업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필 남편이 부재중일 때에 저의 신변에 위험스런 일이 생겼습니다.

저의 집 주변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이 갑자기 요란해졌고 며칠 뒤 이번에는 SBS 취재기자들이 저의 집 주변을 취재하고 다녔습니다.

저는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만 5년 동안 제가 살던 보금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렇게 피난 생활을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저는 가짜로 낙인되어 있었고 부도덕한 여자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신변에 관한 일련의 의심스러운 사건들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지 혼미스러웠지만 그 의문을 푸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KAL기 조작의혹 사태’와 맞물려서 그 의문들을 푸는 데 단초가 되었습니다.

- 추방세력들

저에게 갑자기 불어닥친 일련의 이 의문스러운 사건들은 저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점점 압박하기 위한 위협의 신호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MBC 취재기자들이 습격한 다음날, 저의 임시 피난처 근처를 찾아 온 담당경찰간부는 저의 남편에게 “신문을 함부로 펴서 읽지 말고, 우유 같은 배달물은 조심해야 한다. 이번 일은 정형근 의원을 치기 위한 것이다. 모 지역에 두 달 정도 거주해 주겠는가?”라며 요구했습니다.

그는 이 정도의 정신적, 육체적 충격을 주었으니 우리가 그들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MBC 습격사건뿐만 아니라 자신의 관할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방송3사들의 취재활동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사태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돌아간 후, 제가 그들의 요구에 동의하는 고민을 하는데 필요한 며칠의 기간이 다시 흘렀습니다. 이번에는 국정원 담당관으로부터 저의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저를 향하여 지난번 약속과는 무관하게 MBC 방송에 출연하거나 인터뷰해줄 것을 재차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문제를 논쟁하는 과정에서 MBC의 습격사건은 바로 국정원에 의해서 저질러진 것임이 탄로나게 되었습니다.

저의 출연거부로 인하여 국정원이 오래전부터 기획하고 추진해온 사업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게 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공작원의 눈에는 그 사업이 ‘공작’ 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국정원이 경찰당국, 방송사들과 서로 연계하여 공작사업을 추진해 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를 두고 국정원은 정보관리를, 경찰당국은 보안관리를 각각 나누어 맡고 있기 때문에 저와 관련된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 그들은 서로 공조체계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예를 들어 방송사들이 국정원의 묵인 하에 취재하러 접근하는 것을, 경찰당국이 적ㅈ극적으로 대처하고 자기 직무에 충실했다면 일이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고 봅니다.

국정원이 중심이 되어서 경찰당국, 남한의 주력 방송사와 연대하여 교묘히 저와 저의 가족을 추방한 정말 서글프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 기관은 모두, 절대 서로 아무 관련이 없다고 발뺌을 할 것입니다.

저 김현희와 KAL기 사건에 대해 약속이나 한 듯이 편파방송을 하는 행태는, 그들 방송사들이 공영방송의 의무를 저버린 채 ‘우리는 정권의 선전선동매체로 전락하였다’라고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드러나는 음모들

천주교 신부들의 두 차례 대규모 기자회견은 일종의 신호탄에 불과했습니다. KAL기 사건의 ‘조작음모론’은 MBC 방송을 시작으로 하여 일제히 포문을 열었습니다. 포격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였습니다. 저를 포섭하는데 실패한 국정원은 저를 포함하여 안기부를 정적으로 설정하고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집권 세력들은 군사 정권에서의 정보기관인 ‘안기부’와 탈군사 정권에서의 정보기고나인 ‘국정원’을 구분하여 확연히 다르게 인식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국정원이 자기 정체성을 망각한 채, 자신의 전신인 안기부를 공격하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배후’에서 지휘하며, 자신의 몸을 도사린 채 방송․언론매체들을 이용해 선전하게 되고, 종교․시민단체 ‘전위’ 조직들을 동원해 시위·선동케하는 등 여러 전술을 펴나갔습니다.

저는 그들로부터 추방당한 상태에서 의혹과 위협들이 빗발치는 자욱한 포화 속을 벗어나려고 안간 힘을 썼습니다.

방송3사들은 사건 16주기를 전후로 해서 MBC는 ‘PD수첩’ 프로그램에서, SBS는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KBS는 2부작 ‘일요 스페셜’에서 ‘김현희, 그는 누구인가’, ‘16년간의 의혹과 진실’, ‘김현희와 김승일 의문의 행적’등의 제목으로 저 김현희의 공작행적을 중심으로 취재해 방송했습니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방송3사 제작진들이었습니다. 의문을 제기한 사항들은 임 조사가 되어 자기들의 방송 뉴스나 언론을 통해 보도되거나, 국정원이 그것들의 조사 결과를 자료로 보관중인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저의 해외 공작 행적을 추적, 취재하면서 마치 새롭게 발견한 엄청난 사실처럼 이제 와서 호들갑을 떨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들 제작진들은 이미 재조사된 사실들인 줄 모르는 듯 의혹 사항들을 열심히 취재하고 방송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그들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하였더라면, 영락없이 저는 ‘가짜’로 내몰렸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MBC와 SBS는 저의 출연 거부를 못마땅히 여겼는지 저의 거주지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저의 거주지를 촬영해 노출시켜 버렸습니다.

국정원이 저를 추방하면서까지 방송사들을 지원한 프로그램이 저 ‘김현희와 안기부 죽이기’였다는 사실에 더 이상 말문이 막혀 할 말을 잃었습니다.

MBC의 방송이 나간 다음 날(11/19)에 이를 확인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담당 경찰간부가 찾아와 저에게 방송을 시청한 소감을 물었습니다. 정말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그의 파렴치한 행동에 저는 참을 수 없어 “죽여주세요”라고 소리쳤고, 그는 그렇게 알고 상부에 보고하겠다며 황급히 돌아갔습니다.

경찰당국은 며칠전 MBC 취재기자들의 습격을 피해 저를 새벽 3시에 피신시켜 놓고서는 이제 와서 그들 방송 소감을 물어보러 왔다는 사실에서 그들의 뻔뻔스러움과 이중적 처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저를 피신시킨 것은 그들의 미리 계획된 추방행위였던 것입니다.

국정원과 경찰당국은, 제가 어린 자식들이 있으니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항복할 것이라고 확신했는지 서로 번갈아 가면서 저를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국가기관들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법을 엄격히 준수하고 집행해야 할 그들의 반이성적 행위는 스스로 국가기관임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로부터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감시를 당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국정원과 경찰당국, 두 공안당국과 서로 초긴장 상태로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음모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 방송사들의 연계혐의

저는 현재까지 국정원과 서로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담당관으로부터 “우리는 KAL기 사건 16주년을 맞아 방송사들의 기획 특집방송에 지원을 하였을 뿐이다”라는 변명을 들었습니다.

그들 방송사로부터 ‘가짜’로 내몰린 피해 당사자인 저의 입장에서 보면, 국정원은 지원 수준을 넘어서 어떠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기획하였고, MBC를 포함한 방송3사가 그 지원을 받아 제작․편집하는 등 서로 연계하여 공모한 것이 분명해보였습니다.

국정원이 방송사들과 연계하여 공모한 이유로는 첫째, 방송사들이 적게는 수개월 많게는 1년 가까이 많은 인적·물적 지원을 투자하여 제작 편집한 방송 프로그램들이 한결같이 사건 조작의혹을 다루는 내용으로 편파적 방송을 하였다는 점입니다. 남한을 대표하는 공영방송들임에도 불구하고, 편향되지 않고 공정하게 제작 방송을 하였다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국정원이 지원했다는 결과가 약속이나 한듯이 ‘안기부 수사가 엉터리였다, 김현희는 거짓말을 하였다’고 성토하는 특집 방송이었습니다. 정말 국정원은 방송사들이 제작 편집한 프로그램의 내용을 송출하기 이전에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요. 방송사들이 정보기관의 수사 의혹을 신랄하게 비판 보도하고 있는데 국정원이 중단 요구도 없이 이를 계속해서 지원했다는 것이 저로서는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로, 방송사들의 조작 의혹제기에 대해 국정원은 매우 소극적인 태도로 대응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국정원은 저 김현희와 KAL기 사건에 관련해 방대한 양의 수사 및 정보자료들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원 국내 담당 차장인 박정삼은 ‘KAL기 사건이 남북 대결시대, 냉전시대의 유물이었다’는 애매모호한 말만 했습니다. 방송사들이 제기하고 있는 케케묵은 의혹들에 대해 국정원은 모르는 척하고 그 수사한 자료들을 일부러 제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도대체 국정원이 무엇을 지원했다는 것인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었고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MBC에 출연한 박정삼은 진실게임의 한 편에 서서 그 진실게임을 즐기면서 KAL기 사건 조작 의혹을 조정하는 실질적인 기획자였습니다. 그리하여 방송사들은 저와 KAL기 사건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였던 것입니다.

셋째, 방송사들은 KAL기 조작 의혹제기와 함께 저의 거주지를 촬영하고 방송하여 노출시켜버렸습니다. MBC는 저의 거주지를 습격하고 나서 그곳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노출까지 해버렸습니다. SBS도 이에 질세라 며칠 수 또다시 노출시켜 버렸습니다.

방송사들은 제가 자신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힘없는 죄인을 함부로 길거리로 내동댕이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국정원은 방송사들이 무모한 행위를 그저 바라보고 침묵했습니다. 그들을 제재하거나 항의하고 조사하였다는 말을 저는 지금껏 듣지 못했습니다.

이러고도 국정원은 방송사들과 공모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말 참담한 심정입니다.

넷째, 방송사들이 사건 당시의 검차로가 안기부 수사 책임자들에 대해 취재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방송사들은 사건에 대한 각종 의혹을 제기만 하였지 그런 의혹들을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고, 경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해당사건수사의 전문가이자 책임자들인 그들을 제외하였습니다. 그리고 유족들의 절규장면과 인터뷰 장면을 계속 방송하여 시청자들의 감정을 자극시키는 등 감성에 호소하였습니다.

방송사들은 의도적으로 그들을 취재 대상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그것은 방송사들이 오히려 그들에게서 사건 취재 의도에 대해 의심을 받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국정원 지휘부는 그 점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후임자들이 전임자들을 조사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조사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방송사 제작진들이 수사 전문가들을 취재하여 사건의혹 해소가 되어버린다면 그들의 ‘의혹 부풀리기’ 특집 방송을 할 수가 없었겠지요.

마지막으로, 국정원과 방송사들은 의심에 찬 눈초리로 힘없는 저만 몰아세우려 했습니다. 제가 안기부 재직시 북한 소식을 전해주는 프로그램인 MBC ‘통일 전망대’와 KBS의 ‘남북의 창’에 수시로 출연하여 북한 실상정보를 제공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당시 방송사의 북한국은 시작 초기여서 지금과 달리 북한관련 정보가 빈약한 상태였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태어나 생활하지 않았다면 방송사에서 북한 사회의 실상을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북한국은 교양제작국의 조작설 수준의 의혹제기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 방송사의 교양제작국은 제가 북한인이라는 것조차 의혹의 눈길로 보았습니다. 방송사들은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독약 앰플을 깨물지도 않은 부도덕한 여자’라고 맹비난을 하며 저를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것이 저에 대한 특집방송의 결론이었습니다.

덩치가 큰 방송사들이 저 하나를 두고 으르렁대는 모습이 참으로 딱하게 보였습니다. 방송을 하는 동안, 국정원과 방송사 제작진들은 방송화면 뒤에서 연약한 저를 두고, 저와 시청자들을 비웃고 조롱하면서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저는, 역사는 이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응징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고한 많은 생명을 앗아간 항공기 테러사건을 국가기관과 공영방송 기관들이 정치적으로 악용한 것에 대해 그들은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 방송사들의 문제점

MBC, SBS, KBS 등 방송3사의 제작진들은 1988년 1월 안기부의 수사결과발표문에 초점을 맞추어 취재하고 의혹을 제기하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수사발표 이후에 초동수사에서의 실수나 미흡한 사항에 대해 계속 조사하여 언론에 보도된 자료들을 외면하고 무시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첫 번째 문제점입니다.

방송사들은 안기부가 발표한 저의 부 김원석이 1987년 당시 앙골라 주재 북한무역 대표부의 수산대표로 근무하고 있었다는 것이 완전한 거짓으로 밝혀졌다고 방송했습니다.

그러나 콩고주재 북한 대사관 일등 서기관으로 근무하다가 1995년 3월 귀순한 고영환씨는 “당시 김원석씨는 대외경제 사업부 앙골라 기술협조단 대표로 있었다”면서 “당시로서는 외교관은 아니었지만 정부관리였다”고 월간조선 2001년 11월호에서 말했습니다.

과연 방송사들은 이 기사를 본 사실이 없는 것일까요. 그리고 저의 아버지가 쿠바 외교관으로 재직하였다는 사실 증거자료가 있는데도 국정원은 그들에게 그 자료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서 일까요.

둘째, 방송사들은 제가 북한사람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는 장소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취재하지도 언급하지도 않았습니다.

수사결과 발표 자료에 사진이 크게 붙여져 있는 저의 해외실습 장소인 마카오의 거주지와 거주생활, 중국․광주의 거주지에 대해서 방송3사가 똑같이 간과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시아의 가까운 곳을 두고 멀리 유럽과 중동지역에까지 가서 저의 행적을 취재하는데 많은 시간과 경비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셋째, 방송사들은 어떤 사항에 대해, 사실과 일치하는 부분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을 전체적으로 이야기하고 나서 일치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의혹제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분 오류를 범하였고 그 오류를 무시하면서까지 문제제기를 하였습니다.

방송사들은 암호 수첩에 기재된 부다페스트의 연락처 번호와 베오그라드 북한 대사관 번호 2개가 유치원, 화학공장이라며 의혹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확인된 2개의 연락처 번호인 비엔나 소재 북한 대사관과 베오그라드 소재 공작원 아지트의 번호에 대해서도 언급해야했습니다. 4개의 전화번호 중 2개는 맞고, 2개는 일치하지 않음을 시청자들에게 이해시켜야 했습니다. 시청자들은 일치하는 2개의 전화번호를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넷째, 방송사들은 사건의 사실 내용을 이해하려하지 않고 형식적이거나 2차적인 문제를 꼬투리 잡아 의혹제기를 하면서 내용 전체를 부정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공작 임무를 부여받고 “적후로 떠나면서 다진 맹세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무시한 채, 내용 중 ‘규율’의 철자를 끄집어내어 북한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며 의혹을 제기하였고 다음날 모 조간신문에 ‘규률’로 수정되어 나왔으니 조작되었다며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가 공작원 교육 시 ‘이남화’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혀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이남화’ 교육은 남한에 침투하여 임무 수행을 위해서 공작원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학습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 충성 맹세문은 제가 남한의 조사실에서 남한 철자법에 따라 진술하여 ‘규율’이 된 것입니다. 철자를 바꾸어 썼다고 해도 저로서는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의혹 제기자들은 ‘규율’ 철자 때문에 ‘충성 맹세문’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 동북리 초대소에서 맹세문을 낭독하였습니다.

그리고 방송사들은 화동 사진의 귀를 문제삼아 물고 늘어지며 제가 1972년 11월 남북조절회담시 평양근교 역포에 임시로 마련된 착륙장에 화동으로 참석하였다는 진술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부여받았던 아버지의 직업 등 주변상황에 관한 자료들도 국정원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그 자리에 분명히 있었습니다. 저의 화동 참석 진술이 먼저였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2차적으로 수사관들이 사진을 구해왔습니다. 그 후 일본에서 저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사진들이 입수되어 보도되었는데, 그들은 그 사진들을 절대 방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희선’이라는 북한 여성이 나오는 조총련 촬영 자료를 상세히 방송하였습니다.

다섯째, 방송사들은 사건 의혹제기를 하면서 사건 관련국인 일본, 미국, 북한 등에 대해서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는 사항은 취재, 방송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제가 초대소에서 일본어 교육을 받을 때 함께 생활한 ‘이은혜’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함구하고 외면했습니다. 제가 진술한 이은혜 선생이 ‘다구치 아에코(田口八重子)’와 동일한 인물임을 일본 경시청이 밝혀냈기 때문에 그들이 동일한 인물이 아니라고 의혹제기 방송을 한다면 외교적 문제로 도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들은 수사 발표 후 곧바로 북한을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한 미국에 대해서는 비난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방송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미국과 일본의 개입을 두려워했다고 봅니다.

또한 방송사들은 KAL기 사건이 북한의 소행임에도 불구하고 공작원인 저를 부정적으로 대하면서도 반대로 북한 당국을 자극하지 않고 조심스러워하는 이중적 태도를 견지하였습니다. 심지어 KBS 류지열 담당PD는 ‘김현희는 평양을 출발하지 않았다’고 까지 주장했습니다. 그는 저의 위조 여권을 위조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의 방송 의도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문제점은 방송사들이 KAL기 사건 조작 의혹을 제기하면서 사실과 다르다고만 말했지 실체적 진실에는 전혀 접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방송 제목과 동떨어져서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김현희는 누구인가’라고 열심히 해외를 전전긍긍하며 저의 행적을 추적하여 취재하면서도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저를 외계인 수준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저는 그 점이 미스테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KBS는 2005년 새해 신년특집으로 해방60년을 맞아 ‘10대 미스테리 사건’ 항목에서 KAL기 폭파사건이 3위를 차지했다고 스스로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위’조직과 탄원서 제출

MBC가 KAL기 사건 조작 의혹을 방송한 지 나흘만인 2003년 11월22일 경, 국정원 수사 국장 등 5명은 소설 ‘배후’의 저자 서현필과 ‘창해’ 출판인 전형배를 상대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민․형사 고소를 하였습니다.

그해 12월 초순경에는 언론에 제가 신변노출을 꺼려 가족과 함께 갑자기 잠적하였다는 기사들이 보도되었습니다.

그해 12월 중순경, 이 소문을 놓칠세라 ‘KAL기 가족회(회장 차옥정)’와 ‘KAL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위원장 김병상 신부)’가 “최근 갑자기 사라진 전 북한 공작원 김현희씨를 29만원에 현상수배한다”면서 시위와 함께 수배 전단지를 뿌리고 다녔습니다.

또한 이들 단체는 전두환 전 대통령 집 앞,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당사 앞, 국회, 검찰청, 인천국제공항 KAL 사무실, 국정원 앞 등지에서 시위와 기자회견, 세미나 등을 하여 사건 조작 의혹을 제기하고 전방위로 활발한 행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KAL기 사건 조작설이 방송․언론 등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확산되는 가운데 ‘배후’(서현필저, 창해출판), ‘KAL858, 무너진 수사발표’(신동진저, 창해출판), ‘나는 검증한다, 김현희 파괴공작’(노다 미네오저, 창해출판) 등 책들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KAL기 음모론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형태로 전개된 것입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위 ‘대책위’에 소속된 자들에 의해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소송, 저작, 출판, 시위, 기자회견 등 일련의 사건에는 ‘대책위’소속인원들이 항시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국정원의 ‘전위’조직이었습니다.

‘KAL기 사건 가족회’는 회장 차옥정 등 몇 명의 유족과 신동진(가족회 사무국장, 작가, 국정원 과거사위 조사관) 등 조작 의혹제기를 위해 구성된 조직으로 순수 유족회와는 다릅니다. ‘대책위’는 국정원이라는 국가기관의 후광을 업고 KAL기 사건을 진상규명하라고 외치면서도 사실은 조작 의혹 부풀리기를 하는 여러 단체가 모여서 결성된 정치성향의 시민단체입니다.

위 ‘대책위’는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법원에 사건 관련 정보공개 청구를 하고, 자작극과 저를 가짜라고 하루가 멀게 맹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 사이트는 매우 위험한 수준인데도 공안당국은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KAL858, 무너진 수사발표’를 쓴 신동진은 ‘KAL 가족회’, ‘대책위’ 사무국장으로 일을 하다가 ‘국정원 과거사위’ 조사관으로 3년간 채용, 근무하였는데 이 사실이 국정원과 ‘대책위’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정원이 소송청구한 명예훼손 사건은 서로 연계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국정원이 ‘대책위’의 서현필과 전형배를 고소한 사실은 검찰과 사법당국을 속이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저는 최근(8월초) 검찰과 사법당국에 편지 형식으로 탄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절차법상 아무런 하자가 없어보이지만, 국정원이 검찰과 사법당국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부당한 공권력 행사를 한 사건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소송사건에서 피고인 서현필(소설가)과 전형배(출판인) 외에 변호를 맡은 변호인 심재환도 위 ‘대책위’의 위원입니다. 그래서 이 소송사건은 너무도 계획적인 사건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의 탄원서 제출 때문인지 선고 재판이 한 달 가량 연기되었다가 지난 9월 초순경 소송건이 무혐의 처리되었고, 국정원은 패소당했습니다. 피고인들에게 2년 구형을 내린 검찰은 이에 불복하여 얼마 전인 9월 중순경 항소장을 제출하였습니다. (서울중앙지법 2008 노 3194)

“(P33 접혀서 보이지 않는 부분) 소설 내용이 진실이 아닌 의혹을 (접혀서 보이지 않는 부분) 고, 내용이나 표현이 수사 결과에 배치되는 점이 있더라도 이것만으로 당시 수사를 맡았던 직원들을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책을 펴낸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밝히면서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판결문에는 저의 탄원서 내용이 참고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무죄선고가 사법당국의 명예에 흠집을 낸 사항에 대해서는 인내하겠다는 재판부의 의사표시로도 보였습니다.

한편, 저는 이 소송사건을 통해 KAL기 조작설의 음모가 어느 정도 소문이라도 나주길 바랐지만 아직까지 잠잠한 것을 보니, 저의 탄원서 제출 노력은 그다지 효력이 없었다고 여겨집니다. 제가 국정원, 검찰, 법원 등 국가 기관에 저의 진정을 호소한 것이 처음부터 잘못된 시도였는가요.

- 국정원 과거사 발전위원회

국정원 과거사 발전위(위원장 오충일)는 2005년 2월 초순 KAL858기 폭파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등 우선 조사대상 7건을 선정, 발표하였습니다.

‘발전위’는 그때부터 1007년 10월 하순경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해체되기 전까지의 3년동안, 저에게 사건의 당사자로서 조사받을 것을 십수차례나 요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발전위’의 요구를 모두 거절했습니다.
제가 그들의 조사요구를 거절한 이유는 제가 국정원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위 ‘발전위’에 피조사자로 출석하게 된다면, 국정원이 그동안 저지를 과오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꼴이 되고, 위 ‘발전위’로부터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한 방향으로 사실을 왜곡시키거나 또는 강압적 진술을 해야만 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국정원이 ‘배후’에서 자신의 정도를 훨씬 넘는 공권력 남용 행위를 결코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국정원은 자신의 내부에 조직되어 있는 ‘발전위’를 이용하여 저를 끌어들여 조사하는 과정에서 회유와 협박을 번갈아가며 하겠지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국정원으로부터 그것을 견디어내는 일이 무척 고통스럽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발전위’의 오충일 위원장을 비롯하여 안병욱 교수, 한흥구 교수, 박용일 변호사, 이창호 교수 등 민간 조사위원들 10명은 대부분 정보기관의 피해자이면서 자기 방식의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 진보성향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들의 조사에 응하는 자체가 KAL기 사건의 근본이 훼손될 것 같아 조사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위 ‘발전위’가 KAL기 사건을 우선 조사대상으로 선정한 이상, 조사 결과를 발표해야만 하는데 저의 조사 없이 과연 어떻게 발표하는지 매우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역사를 자기 방식으로 재단하려는 ‘발전위’의 사건 재조사 결과 또한, 역사에 남게 될 것이고 후일 그들 역시 역사의 비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 ‘발전위’는 2006년 8월초 KAL기 사건 조사 중간발표를 하고 그해 연말 결과 발표를 할 예정이었으나 다음해인 2007년 10월 초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나서 10월 하순에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해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김현희는 북한 공작원이다’, ‘무지개 공작문건이 발견되었다’라는 정도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들은 사건 당시 지휘부와 당사자인 저 김현희를 조사하지 않고도 결론을 내렸습니다. 북한에 대한 사과, 권고 한마디 없이, 그리고 힘없는 여자 하나도 조사하지 못하는 위원회였던 것입니다. ‘발전위’의 권위는 그것으로 땅에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오충일 위원장은 KAL기 사건을 조사하는 핵심은 ‘김정일이가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혀내는 것이다’라고 말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사위원 이창호 교수도 결과 발표 후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다’라는 것과 ‘김정일이가 지시를 내렸다’는 것은 별개의 사항으로 학계에서 정설로 되어있다면서 사건의 실체에 흠집을 내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고한 민간인의 생명을 앗아간 항공기 테러 사건을 누가 지시했는지 스스로 밝혀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김정일을 옹호하려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방송사들이 제가 공작임무를 맡고 떠나기 전 낭독한 ‘적후로 떠나면서 다진 맹세문’을 조작 의혹의 기본 항목에 넣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지개 공작’문건을 공개한 국정원의 행동은 정말 이상했습니다. 인터넷 신문 ‘통일 뉴스’의 요청에 의해서 국정원이 공개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국정원은 ‘무지개 공작’ 문건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통일 뉴스’에 문건을 제공하고 공개하도록 하는 아주 친절한 정보기관이었습니다. 그리고 비밀로 분류되지 않은 공작 문건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저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 진실화해위원회

2006년 8월 초순경, 국정원 과거사위가 저를 조사하지 못한 채 중간 조사 발표를 한 후, 이창호 위원은 법적 권한이 있는 진실화해위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압박을 가해서라도 저를 조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2006년 11월 중순경, KAL기 가족회는 ‘진실화해위’에 재조사를 신청하였고, 다음해인 2007년 7월 중순 ‘진실화해위’는 사건 조사 개시를 결정하였습니다.

2006년 12월 초, 송기인 위원장은 KBS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유족들이 우리에게 국정원 과거사위의 조사 결과가 미흡하다고 하여 신청을 하였다고 동행명령권은 있지만, 김현희를 조사할 수 없다면 강제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이 필요하여 국회에 강제구인 법안을 제안하였는데 아직 법사위에 상정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

2007년 12월 초, 안병욱 신임위원장은 “진실을 밝혀야 하지만, 어떤 것은 적당히 덮어둬야 한다”면서 KAL기 사건 재조사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국정원 과거사위 위원재직 시절 ‘KAL기 사건은 안기부 조작이 아니다’라고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해 시민단체로부터 맹렬한 비판과 수모를 당한 사실이 있습니다.

최근 국정원 지휘부에 저의 편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담당 직원들로부터 “진실화해위에서 저를 조사하려고 하고 있다. 소재지를 알려달라고 하는 것을 버티고 있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국정원은 저에 대해 국정원 과거사위의 조사가 실패로 끝나자 이번에는 ‘진실화해위’를 통해 끝까지 조사받게 하여 저를 궁지로 계속 내몰려고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국정원이 지난 정권에서 저지른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위원회를 통해 면해 보려는 술책으로도 보입니다. 그리고 제가 조사받고 공개된 자리에서, 건재한 그들 세력들이 저에 대해 신변 위협을 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있다고 생각됩니다.

KAL기 사건이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에 신청되어 조사를 하고, 그 결과 발표를 하기 전까지는 KAL기 ‘조작의혹사태’는 끝나지 않고 계속 진행될 것이고, 저는 국정권과 여전히 긴장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수사국장의 방문

제가 국정원과 적대적 관계를 수년 동안 유지해 오던 중, 김만복 원장의 서신을 두차례 거절하자, 2007년 2월 하순경 국정원 이모 수사국장과 직원들이 저를 방문하였습니다.

수사국장은 저를 대신하여 저의 남편에게 “‘발전위’에서 KAL기 사건에 대해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발전위’가 이 사건을 마무리해서 ‘진실화해위’(당시 송기인 위원장)로 관련 서류를 넘기면 ‘진실 화해위’는 그 테두리 안에서 조사하고 발표할 것이다. 만약 김현희가 ‘발전위’의 조사에 응하지 않으면 ‘진실화해위’에서 법원 구인장을 발급받아 강제연행하였습니다./이동복 전 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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