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흐테르는 세 명의 아버지로 친아버지와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스승 겐리흐 네이가우스를 이야기합니다. 생물학적인 아버지와 예술적 뮤즈 바그너, 고아가 된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줬던 스승의 삶을 따랐습니다. 공교롭게 친아버지는 폴란드계 독일인, 스승은 폴란드/독일 혈통의 러시아인이었습니다. 기교의 절제와 깊은 내면에의 추구, 독일적 낭만주의와 개성을 높은 가치로 여긴 점에서 스승과 제자는 러시안 피아니즘과는 몇 보의 거리를 내내 견지했습니다.

20세기 음악의 제국이었던 러시아의 기세는 여전히 막강하며 그 중심핵은 모스크바 음악원입니다. 베토벤-체르니-리스트의 피아니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러시안 피아니즘의 독자성을 창시한 알렉산더 골덴바이저(1875-1961)를 이어 모스크바 음악원 최고의 교수로 평가되는 네이가우스는, 자칫 경직 일로를 걸을 수 있던 러시안 피아니즘에 자유와 상상을 불어넣은 인물입니다. 러시안 피아니즘의 방향이 골덴바이저에 의한 것으로만 흘렀다면 키신, 플레트네프, 술타노프와 같은 피아니스트들의 탄생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러시안 피아니즘은 소련에 남은 음악가들과 망명을 택한 음악가들에 의한 두 줄기로 뻗어나갑니다. 혁명 직후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소련은 음악가가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역사상 매우 드문 나라였습니다. 국책 사업에 의해 연주자들을 양성했고, 공산당에 순응한다는 한 가지 조건만 따르면 모든 지원은 전폭적이었습니다. 소련 해체 직후 예술가들이 생계를 찾아 나서야 했던 풍경도 있죠. 당에 의한 전폭적 지원과 혹독한 훈련은 에밀 길렐스 같은 강력한 연주자를 탄생시켰고, 동시에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빚어진 '이니그마' 리흐테르를 탄생시킵니다. 창작자였던 쇼스타코비치나 프로코피예프가 받았던 처절한 핍박과 종류가 같지는 않으나, 끊임없이 리흐테르를 옭아매려 시도했던 당의 규제는 역설적으로 그를 위대한 예술가로 빚어냅니다. 조국과 동족을 사랑해 서방 망명이 아닌 고국에 남아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무료 연주회도 마다 않던 태도,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끝내 공산당에 가입하진 않은 태도. 모순적인 사랑과 자유는 그의 음악성을 이해할 단서가 되어줍니다.

그는 베토벤 소나타를 많이 연주했지만 많은 이들이 사랑한 '발트슈타인'과 '월광'은 연주하지 않습니다. 이미 많이 연주되었거나 다른 연주자의 해석이 완벽했다 생각되는 곡은 연주하지 않는다, 헨델의 건반 모음곡이나 하이든의 소나타처럼 숨겨진 보석이라 생각한 작품을 적극적으로 발굴한다, 그가 가졌던 원칙입니다.
독학으로 시작한 덕에 그의 연주에는 독특하고 투박한 요소들이 곳곳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악기와 연주 환경에 따라, 혹은 작곡가에 따라 전혀 다른 피아노를 들려줬습니다. 다양한 작곡가에 녹아들어 고유의 정서를 구현해낸 것은 루빈스타인 정도를 예로 들 수 있으나 그 역시 바흐에는 도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리흐테르의 광활한 레퍼토리와 고른 음악성은 전무후무한 것이며, 그를 최고에 올려놓습니다.

네이가우스는 그를 '작품을 위에서 내려다 보며 전체를 조망하는 드문 음악가'라 평했으나, 그는 삶 자체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인물이었습니다. 인생과 환경의 온갖 고통 속에서도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억압해 얻던 그만의 자유. 예술적 산물과 별개로 그것은 한 개인에게는 가혹한 무게였을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말년에 이르러서야 리흐테르는 자신을 조금 공개합니다. 평생 독신이었으며 감각적 사랑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회피로 일관했던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소문은 이제 정설로 여겨집니다. 소련 체제에서 이는 매우 치명적이었기에 당국은 그를 더 통제하고자 했고, 오직 이 부분에 있어서 그는 순응적이었습니다. 더욱 은둔자가 되어갔고, 끊임없이 고독과 음악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생의 마지막에야 겨우 자신을 드러낸 노인 리흐테르의 눈은 회한으로 가득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개인적 인터뷰를 한 문장으로 갈무리합니다. 예술의 찬란함 앞에 놓인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고, 내 삶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게 전부다.'

 

 

 피아니스트 김별 

- 개인 연주회 <마음 연주회> 208회

- e조은뉴스 <피아니스트 김별의 별별예술>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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