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러시아제국 지토미르(현 우크라이나)에서 리흐테르가 태어나고, 2년 후 혁명으로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합니다. 그의 생을 추적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연주 후에는 관객의 박수가 멎기도 전에 연주회장을 멀리 벗어났습니다. 삶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고, 소련이라는 싸늘한 장벽은 더욱 그림자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20세기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시대였고, 리흐테르에 대한 재평가는 21세기에야 활발해져 뒤늦게 그는 20세기를 대표하게 됩니다.

폴란드계 독일인인 그의 아버지는 빈 음악원에서 공부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였습니다. 폭력 사건에 연루돼 우크라이나로 피신했고, 제자였던 러시아인과 결혼해 그를 낳습니다. 아들에게 음악의 기본을 가르쳤으나 대체로 냉담했습니다. 리흐테르는 20대 초까지 독학으로 피아노를 익힙니다.
뒤늦게 모스크바로 향해 러시안 피아니즘의 대부 겐리흐 네이가우스(1888-1964) 교수를 사사합니다. 첫 만남에서 네이가우스는 그의 재능에 감탄하고,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에게 소개합니다. 프로코피예프는 막 작업을 마친 피아노 소나타 6번의 초연을 25세의 그에게 부탁, 큰 성공을 거둡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첫 족적입니다.

이듬해 독소 전쟁이 발발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과거 독일 영사관에서 피아노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비밀경찰에 체포, 고문 후 총살당합니다. 어머니와도 연락이 두절됐고 종전 후 사망을 통보받습니다. 정보당국은 그 역시 감시 대상으로 지정, 도청과 미행이 늘 그를 따릅니다.

1943년 1월 18일, 프로코피예프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완성한 소나타 7번의 초연을 다시 그에게 부탁합니다. 나흘 만에 곡을 익혀 암보로 연주했고, 이 연주회는 그를 소련의 제1 피아니스트로 올려놓습니다.
전쟁의 막바지던 1945년에는 소비에트 전 연방 피아노 콩쿠르에도 참가, 심사위원장이던 쇼스타코비치는 그에게 극찬과 우승 타이틀을 선사합니다. 1949년 당으로부터 스탈린상을 받고 '인민예술가' 호칭을 부여받습니다.

1953년 스탈린 사망을 계기로 소련은 문화 개방을 시작합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우수성을 서구에 과시하겠다는 선전포고였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가 미국에 진출해 서방세계를 뒤흔듭니다. '독일계' 리흐테르의 서방 진출은 한참 후에야 승인됩니다.

1960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첫 서방 데뷔를 갖습니다. 죽었던 어머니의 전화를 받습니다. 퇴각하는 나치군을 따라 망명해 서독에서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연주회는 엄청난 성공과 평단의 극찬을 거머쥡니다. 객석 맨 앞에는 그의 어머니가 앉아 있었고, 연주회 후 모자의 극적인 상봉. 아버지의 비극적 죽음과 그에 따른 어머니를 향한 애증. 수많은 감정을 뒤로, 20년 간 죽은 줄 알았던 모자는 눈물로 짧게 포옹합니다. 3년 후 어머니가 사망합니다.

카네기홀을 시작으로 한 미국 순회는 서유럽과 일본, 전 세계를 향한 순회로 확대됩니다. 그는 더욱 자신의 삶을 비밀에 부칩니다. 80년대 말이 되면 그는 작은 장소를 찾아다니며, 악보를 보고 조명을 끄고 연주하는 패턴을 확립합니다. 화려함을 더욱 배격합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됩니다. 1994년 생의 마지막 즈음 한국에 방문해 예술의 전당에서 연주회를 가집니다. 포르테시모를 사랑했던 그는 1995년 청력 이상으로 은퇴합니다. 1997년, 러시아연방 모스크바에서 사망합니다. 생전 함께 친분을 나눴던 프로코피예프, 네이가우스, 쇼스타코비치, 길렐스, 오이스트라흐가 안장된 노보데비치 공동묘지에 안장됩니다.

 

 

 피아니스트 김별

- 개인 연주회 <마음 연주회> 208회

- e조은뉴스 <피아니스트 김별의 별별예술> 연재 중

- 서울문화재단X성동문화재단 <잇고, 있고> 소리 프로젝트 작곡

- 제6회 대한민국 신진연출가전 - 음악 낭독극 프로젝트 <공명> 음악감독

- 코리아뉴스타임즈(현 이코리아) <김별의 클래식 산책> 2017~2018 연재

저작권자 © 인터넷조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