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1부에서 이어집니다.)
함관령에서 홍랑과 이별하고 떠나온 최경창 역시 서울에 돌아온 이듬해, 병으로 자리에 누워 봄부터 겨울까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최경창이 병석에 누워있다는 소식을 들은 홍랑은 서둘러 길을 나섰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7일만에 서울에 이르러 병석에서 신음 하는 최경창을 만난다. 홍낭은 수척해진 최경창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1년 반 동안 떨어져 있으면서 쌓였던 그리움을 눈물로 녹여내려는 듯 소리 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병 수발을 들었다. 홍랑의 정성으로 최경창의 건강은 빠르게 회복되어 갔으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두 사람의 재회는 뜻밖의 파란을 몰고 왔다.
   
홍랑이 최경창을 간병하는 소문은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 비화되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1576년(선조 9년) 양계의 금(兩界禁 : 함경도 사람들의 서울 도성출입을 제한하는 제도)을 어겼다는 이유와, 

마침 명종 왕비 인순왕후의 국상이 있었던 직후라 정서적인 분위기까지 겹쳐서 파직을 당하게 되었고, 홍랑은 서울에서 추방되어 어쩔 수 없이 경성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두 연인의 애틋한 재회는 파직과 이별로 막을 내리고, 홍랑은 나라의 법을 원망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서울을 떠났다.

​최경창은 떠나는 홍낭을 이별하면서 절절히 가슴을 오려내는 심정을 담아 [송별:送別]이라는 시를 지어 주었다.

相看脈脈贈幽蘭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幽蘭)을 주노라.)
此去天涯幾日還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리.)
莫唱咸關舊時曲  
(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르지 말라.)
至今雲雨暗靑山  
(지금도 궂은 비구름에 첩첩 청산이 어둡구나.)
 
옛날, 함관령에서 이별 할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보내며 자신처럼 여겨 달라던 홍랑의 시에 최경창은 난초 한포기를 건네는 것으로 화답하며 자신의 애끓는 심정을 읊조렸다.
 
홍랑과 두번째 만남과 이별후에 최경창은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1583년(선조 9년)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멀리 함경도 땅에서 사랑하는 임과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홍랑에게 날아든 최경창의 부음은 그녀를 몸 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으로 몰아넣었다.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死者不可還生) 법이라. 이제는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통한에 홍랑은 목을 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홍랑은 다시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객사를 했으니 마땅히 무덤을 돌보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앉아서 울고만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경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에 당도한 홍랑은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시묘살이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각 끝에 홍랑은 몸을 씻거나 단장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천하일색인 자신의 얼굴에 칼로 상처를 내어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추녀로 만들었다.
 
그것에 만족하지 않은 홍랑은 또한 커다란 숯 덩어리를 통째로 삼켜서 스스로 벙어리가 되기까지 했다. 홍랑은 최경창의 삼년상을 무사히 마친 뒤에도 무덤을 떠나지 않은 채 그의 영혼 앞에서 살다가 죽으려 했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녀에게 그런 작은 행복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으니, 바로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의 발발이 그것이었다.
 
홍랑은 자기 한 몸이야 사랑하는 임의 곁에서 죽더라도 여한이 없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문장과 글씨들을 보존해야 했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최경창이 남긴 유묵을 챙겨서 품에 품은 홍랑은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향했는데, 그로부터 7년의 전쟁 동안 그녀의 종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랐던 홍랑은,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선조 32년) 해주 최씨 문중을 찾아 최경창의 유작을 전한 후, 그의 무덤 앞에서 파란 많고 한많은 한 여인의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전 국토가 황폐 할 정도로 잔혹했던 전쟁 중에서도 오늘날까지 최경창의 시와 문장이 전해지게 된 것은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그것을 지켜온 홍랑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집안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장사를 지내고, 최경창과 부인 선산 임씨(善山 林氏)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으니,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에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있는 그녀의 묘비에는 '詩人洪娘之墓' (시인홍랑지묘) 라고 쓰여져 있다.
 
죽음조차도 갈라 놓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은 양반 사대부 문중까지도 감동시켜, 비록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최경창의 묘소 바로 아래에 그녀를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지금쯤 그들은 이별도 없고, 갈등도 없고, 전쟁도 없는 천상에서 재회하여 전생에 못다 이룬 숭고한 사랑을 만끽하고 있으리라.
 
홍랑의 무덤 옆에는 1980년대에 전국 시가비건립 동호회에서 세운 [洪娘歌碑]가 다소곳이 서있는데, 그 시비 앞면의 [孤竹詩碑]에는  홍랑의 [묏버들...] 시를 최경창이 漢譯한 翻方曲이 새겨져 있고, 뒷면 [洪娘歌碑]에는 그녀의 [묏버들...] 원문이 새겨져 있는 톡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살아서는 만남과 이별을 거듭 할 수 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사랑이 죽은 후에는 영원히 함께 있으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을 세운 사람의 정성과 재치를 느끼게 하는 노래비가 아닐 수없다.   
최경창(崔慶昌, 선조1539∼1583)은 해주 최씨 전한공파(典翰公派 ) 19세 손으로 전라남도 영암출생.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이다.

1561년 진사과(進士科), 1568년 문과(文科)에 급제. 관직은 부사(府使)에 그쳤고, 청백리에 올랐다. 최경창과 홍랑의 애절하고 숭고한 순애보 를 통하여, 진정한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계기가 되는 화요일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홍랑"의 노래입니다.
https://youtu.be/hUFBwOZm6Z0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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