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명기(名妓)' 하면 황진이(黃眞伊)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정말 '조선시대의 최고의 기생'으로 감히 홍랑 (洪娘)을 꼽을 수 있다. 두 기생의 공통점은 예기(藝妓) 즉, 노래, 춤, 그림, 글씨, 시문 따위의 예능을 익혀 손님을 접대하는 기생이자 재색을 고루 갖춘 여류 시인이다.

이들 두 여인의 차이점은 황진이는 명문대가 황진사댁 첩의 딸로 동네 머슴이 황진이를 짝사랑 하다가 그만 상사병으로 죽어 그의 상여가 황진이 집 앞을 지나가다 멈춰 어느 점쟁이의 부탁으로 황진이의 속곳을 상여에 덮어 주어 그 상여가 움직이게 하였다.

그러나 홍랑은 황진이와 전혀 출신이 다르다. 홍랑은 비록 관기였지만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명성이 높았던 풍류 문장가 고죽 최경창에게만 일생동안 그의 모든 것을 바친 여인이었다. 

충신불사이군이요, 열녀불경이부라
(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사육신 성삼문을 '충신불사이군' 이라면 홍랑은 '열녀불경이부'로 비유 될 수 있다. '열녀'는 물론 조강지처 적실인 여인에게만 해당되긴 하지만 '홍랑과 최경창의 애틋하고 감동적이며 고귀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선 선조 때 홍원(洪原) 땅의 예기(藝妓) 이자, 재색을 겸비한 여류시인이기도 하였던 홍랑(洪娘)은 이름을 애절(愛節) 이라 하였으며, 유교적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기생의 신분으로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사대부 가문의 족보에 오르고, 선산에 그의 유골이 묻혔다는 사실을 보면 홍랑이 어떤 인물이었던가를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함경남도 홍원 출신인 홍랑은 경성(鏡城) 관아의 관기였다. 비록 신분은 비천했으나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했던 홍랑의 소양과 재질은 양반 사대부나 시인 가객들에 뒤지지 않았다.

일부종사를 맹목으로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기생이었지만, 많은 남자들의 유혹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신만의 정절을 받쳐 사랑 할 운명적 만남을 꿈꾸고 있었다.

이런 홍랑의 아름다운 재색과 지혜는 마침 내 당시 삼당시인(三唐詩人) 또는 팔문장 (八文章)으로 명성이 높았던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을 만나면서 세세생생에 변하지 않을 뜨거운 사랑을 엮어가게 된다.

전남 영암출신인 최경창은 탁월한 문장가 인데다가 악기를 다루는 재주와 활솜씨 또한 뛰어났던 인물인데, 1568년 과거에 급제하고, 5년 후인 1573년(선조 6년)에 함경북도 경성지방의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하게 된다.

변방에 위치한 경성은 예로부터 국방의 요지로 중요한 군사 지역이었으므로 가족을 동반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최경창은 처자를 남겨 두고 홀로 부임하여 오지인 경성에 머물러야 했다.

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던 고죽 최경창은 경성 땅의 기생이던 홍랑의 미모와 재능에 매료된다. 이들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적이었는 지도 모른다. 홀로 고적한 생활을 하던 최경창에게 홍랑은 결정적인 사랑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농밀한 사랑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결국 홍랑은 군사임무를 수행하는 막중(幕中)에서 최경창과 함께 기거하며 부부처럼 정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인 1574년(선조 7년), 두 사람의 사랑 앞에 이별이라는 엄청난 시련이 찾아온다. 임기가 끝난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고, 당시 관아에 속해 있는 관기는 해당 지역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속절없는 이별 앞에 홍랑이 할 수 있는 일은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것 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최경창이 서울로 떠나는 날, 홍랑은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기 위하여 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 까지 태산준령을 넘어서 며칠 길을 마다 않고 따라가며 최경창을 배웅했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두 사람은 이윽고 함관령 (咸關嶺)고개에 이르렀고, 더 이상 경계를 넘을 수 없었던 홍랑은 사무치는 사모의 정을 뒤로하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이미 날은 저물고 비는 내리는데 피 할 수 없는 이별 앞에서 홍랑도 최경창도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길옆에 피어있는 산 버들이었다. 울음을 삼키면서 홍랑은 그 버들가지를 꺾어 고죽에게 주며 구슬프게 시조 한 수를 읊었으니,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 묏버들 가려꺾어 ”..이다. 

折楊柳寄與千里 
(묏버들 가려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人爲試向庭前種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須知一夜生新葉 
(행여 밤비에 새 잎이라도 돋아나면)
憔悴愁眉是妾身 
(마치 나를 본 것처럼 여기소서.)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님에게 바치는 순정은 잎이 시들었다가도 심기만 하면 다시 싹을 틔우는 묏버들처럼 항상 그의 곁에 있겠다고 다짐한 이 연정가(戀情歌) 처럼, 최경창이 떠난 뒤 홍랑은 그리움으로 눈물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내일은 2부로 이어집니다.)

오늘도 후회없이 순수한 사랑이 있는 아름다운 하루가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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