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부에서 이어집니다.)
● 명 성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한동안은 학계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이름도 없는 특허 국의 청년 기사의 논문의 가치를 처음으로 인정한 것은 플랑크였다. 플랑크는 1907년에 아인슈타인 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그 중요성을 세상에 알렸던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많은 물리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둘러싸고 토론을 하였고, 1908년에는 질량이 속도와 더불어 변화한다는 상대성 이론으로부터의 결론이 실험적으로 확인되었다.

이리하여 아인슈타인은 마침내 학교의 인정을 받게 되어, 1908년에 베를린 대학의 강사가 될 수 있었다. 그 후로 급속히 명성이 올라감에 따라 아인슈타인은 여기저기의 대학으로부터 경쟁적 으로 초청을 받기에 이르렀다. 1090년에는 취리히 대학의 이론 물리학 교수가 되고 1911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 대학에 이론 물리학 교수로서 초빙되었다. 

그 이듬해 10월에는 모교인 연방 공과 대학의 교수가 되어 다시 취리히로 돌아왔으나 그것도  1년 남짓, 베를린의 프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와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로부터 파격적인 대우로 초빙되어, 1914년 봄에 베를린으로 옮겼다. 이 때 독일제국은 아인슈타인에게 프러시아의 명예 시민권을 증정했다. 

이 무렵 아인슈타인은 1905년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킨 일반 상대성 이론을 만들어 내려고 피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베를린의 생활은 물질적으로는 후대를 받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즐거운 것이 못되었다. 

독일 전체를 뒤덮고 있던 군국주의는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 대전에 의하여 더욱 기승을 부렸다. 베를린의 아카데미와 대학에 충만해 있던 거만스러운 형식주의, 이런 것들은 무엇보다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며, 누구에 대해서도 솔직함을 잃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는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베를린으로 옮겨 온 다음 얼마 안 가서 부인과의 이혼이라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과학상의 이론 중 가장 추상적 이고 가장 정교하게 받아 올려진 일반 상대성 이론을 끈질기게 건설해 나갔던 아인슈타인의 의지의 힘과 두뇌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5년에 완성됐다. 이 이론은 빛의 진로가 강한 중력의 장 속에서 굽어진다는 것을 예언했다. 

이 예언이 옳은지는, 개기일식때에 태양 바로 옆에 보이는 별의 위치를 측정하면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별에서 나오는 빛이 태양의 중력으로 굽어진 다면, 별은 평소의 위치에서 어긋나 보일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안 된 1919년 5월  29일에 그것을 확인할 기회가 찾아 왔다. 영국의 학자들은 개기일식의 관측대를 파견 했다. 그 관측 결과는 신중히 검토 되었으며,  아인슈타인의 이론적 예언은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 사실이 발표되자 온 세계는 발칵 뒤집혔다.  학자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뉴턴의 권위를  뒤덮어 놓은' 위대한 과학자로서 아인슈타인의 이름은 일반 사람에게도 급격히 널리 알려지게 되어 신문 기자들이 몰려들고 편지가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1921년에는 노벨물리학상이 수여되고,  이 때부터 이듬해에 걸쳐서, 프랑스, 미국, 영국, 남아프리카, 일본등에 초청되어 강연을 했으며 각지에서 대중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명성에 누구보다도 곤혹을 느낀 것은 아인슈타인 자신이었다. 그는 과학의 연구를 위해서는 조용히 내버려 두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업적을 우연히도 귀중한 보석을 찾아낸 것과 같다고 생각 하고 겸손한 마음, 타고난 소박성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그와같은 태도가 또한 대중의 아인슈타인 에 대한 경애의 감정을 더해 주었던 것이다.
(내일은 마지막 4부로 이어집니다.)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 보내셨나요? 오늘도 즐거운 마지막 명절 연휴가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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