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하게 보여 적의 선제공격을 유도하고 여론에 힘입어 반격하라!"

세계 3대 전쟁영웅이라면 나폴레옹과 알렉산더,  징기스칸이다. 이들 중 최고의 정복자가 징기스칸 이라는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전쟁기술에 관한 한 징기스칸은 평범한 인물이었다. 징기스칸의  일생은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러나 그가 40여세 되던 해 몽골족을 통일시켰을 때 휘하에 거느린 병력은 고작 1만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살해된 아홉살 때부터 싸움을 시작해서 30년 동안 줄기차게 싸워서 겨우 1만명의 병사를 확보하는 데 그칠 정도로 그는 형편없는 무장이었던 것이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전차전에 맞서는 기병전을 개발했다. 중갑병 밀집대형으로 이루어진 방진을 깨뜨리는 포위전을 최초로 시도한 것이다.  무적이었다. 그는 싸움마다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전술상의 혁명이라 할 만하다. 

나폴레옹의 포격전도 전술상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할 만하다. 적어도 개전 초기에는 나폴레옹을 상대할만한 적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징기스칸은? 
활이나 좀 쓰고 창이나 좀 휘두른다는 징기스칸은 도무지 무엇을 잘했단 말인가? 징기스칸은 일생동안 줄기차게 싸웠지만 단 한번도 쉽게 이긴 적이 없다. 그는 매번 아슬아슬한 싸움을 했으며 힘겨운 승리를 거두었다. 

물론 징기스칸이 압도적으로 이긴 전투도 많다.  그러나 그런 손쉬운 승리는 징기스칸이 나이 50을 넘어서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이 앞장선 전투에서 얻어졌다.   

까놓고 이야기하자. 징기스칸은 키가 크고 힘이 센 거인도 아니고, 활이나 창을 잘 다루는 무사도 아니다. 그는 평범한 유목민 족장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알고보면 징기스칸은 뛰어난 정치가이자 개혁가 였다. 그는 국가가 없던 유목민 세계에서 구조 개선을 통하여 기초가 튼튼한 국가를 만든것이다.  징기스칸의 성공은 테무진(鐵木眞)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실은 징기스칸이 설계한 국가를 물려받은 그의 아들과 손자들의 성공이었다. 

보통 영웅이 죽으면 제국은 몰락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징기스칸 사후 그의 제국은 더욱 확대 되었다. 그 거대한 힘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징기스칸은 국가의 설계자이다. 
징기스칸의 아버지 에스게이는 작은 부족의 족장에 불과했다. 그나마 테무진이 아홉 살 때 죽었다. 소년 징기스칸에게 정복의 야심 따위가 있을리 없다. 한 때는 적대적인 부족에게 끌려가 노예생활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아내를 적에게 빼앗긴 적도 있었다.(아내를 약탈당한다는 것은 유목민 세계에서 최대의 모욕이다)
 
자객을 피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그는 생존의 달인이 되었다. 그의 정복은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야망이 아니라, 실은 그를 제거하려는 정적들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었던 것이다.

징기스칸의 주된 전략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덜 지는 것이다. 그는 늘 강한 적과 부닥쳤지만 어떤 경우에도 군대의 주력은 보존했다. 여러번 전멸의 위기를 당하면서도 후에 제국을 나누어 통치하게 될 아들들과 손자들, 사촌들의 목숨은 끝까지 보호했던 것이다.
 
대신 몽골족이 승리할 경우, 적의 남자는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였다. 몽골족이 한번 승리할 때마다 지도에서 부족의 이름이 하나씩 지워졌다. 그러나 여전히 몽골족은 작은 부족이었 고 보통 1만 병이나 3만 병을 거느렸을 뿐이며,  일생동안 전쟁을 벌이고도 60세 할아버지가 되어서야 겨우 12만 병의 대병을 거느리게 되었다.
 
당시 고원의 유목민들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유목생활을 하는 중에 다른 부족으로 옮겨가는 일이 흔했다. 징기스칸이 적대적인 부족으로부터 한번 공격당할 때마다 몽골부족의 인구가 두배씩 늘었다. 왜 그들은 파오를 걷고 징기스칸 주변으로 옮겨온 것일까?
(내일은 2부로 이어집니다.)

오늘도 한 주를 힘차게 시작하는 활기 찬 월요일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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