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메니데스(Παρμενίδης,BC 540?~BC 450?)는 기원전 540년 경 세워진 그리스의 식민지 이탈리아의 남쪽 엘레아(Elea)에서 태어나 엘레나 학파를 낳게 한 고대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그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그의 철학이 세상에 드러난 이래 19세기 헤겔(1770~1831)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형이상 학자들에게 나타나는 형이상학적인 논법을 최초로 생각해 냈기 때문이다. 

이 논법은 서기 6세기경에 활동했던 신 플라톤 주의자 심플리 키스(Simplicius)의 저작에 인용되어 단편(斷片)으로 남은 철학 시 [자연에 대하여 peri physeos]에서 등장하는데, 인간의 감각을 기만적인 것으로 보고 감각적인 것들은 단지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면서 유일한 참된 실재(實在)는 일자(一者,the one: “존재하는 것은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으며, 나누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이 있지도 않고, 더 적게 있지도 않은 하나의 연속적인 전체”)이며 이것은 무한하고 분할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또 그는 두 종류의 탐구의 길에서 하나는 "진리의 길(the way of truth, ‘진리<aletheia>의 길’)"이 있고, 다른 하나는 "속견의 길(the way of opinion, 단순한 ‘의견<doxa>의 길’)이 있다고 보았다. 

"진리의 길"은,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는 생각할 수도, 지시할 수도, 알 수도 없고,(이것은 불가능한 일) 또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은 “실행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다"라는 주장은 많은 논란거리를 불러왔다. 

그 이유는 천당이나 지옥, 천사나 사탄, 용이나 공룡 그리고 맘모스 등 얼마든지 생각하고 또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는 무엇으로부터 무엇이 생성된다는 생성의 주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 어떤 경우에도 생성은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진리의 길’과 단순한 ‘속견의 길’이 갈라지는 것은 생성과 소멸을 믿는, ‘죽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지 않음’을 탐구의 길에 도입 하여 ‘있음’과 뒤섞은 데에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죽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있음과 있지 않음이 같은 것으로, 또 같지 않은 것으로도 통용되고 있다"라고 비난한 것이다. 

예컨대, 생성되기 전의 상태를 ‘없음’이 아님에도  ‘없는 것’으로, 소멸된 후의 상태도 ‘없음’이 아님에도 ‘없는 것’으로 보아야만 생성과 소멸을 주장할 수 있고, 동시에 ‘생성’과 ‘소멸’이라는 개념 자체가 있음과 없음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한 ‘속견의 길’에서 ‘진리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생성, 소멸, 변화 등 존재와 관련된 여러 개념에 대한 탁월한 논리적 분석, 이성적 판단이 필요하고, 그 핵심은 서로 모순되는 개념을 뒤섞지 않아야 한다는 '존재하는 진리의 세계와 경험을 통한 의견의 세계' 사이의 틈바구니를 헤집고 들어갈 어려운 화두를 남겼다. 

이어 등장한 인물은 역설의 논리학을 도입한 인물로 유명한 파르메니데스의 제자 '제논'이다.

오늘도 주일의 첫날을 힘차게 출발하는 
월요일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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