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墨子(본명은 묵적(墨翟) BC470?~BC391? 또는 BC501?~BC416?)는 중국 노나라에서 태어난 겸애주의 사상가요 평화주의자다.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자신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실행에 옮긴 인물이었기에 제자들의 존경을 받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서 공자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으나 정확한 출생기록은 없다. 

대략 기원전501~기원전 416사이 노나라에서 출생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춘추전국시대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스승의 교훈을 철저히 실천에 옮기다 한 전쟁에 참가하여 모든 제자들이 한꺼번 에 죽게 되어 그의 제자들은 대가 끊겨 버렸다. 

그리고 漢나라 때 동중서가 공자의 유가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접목시킴으로써 묵가의 사상은 잊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청나라 때 도가사상 서적에서 묵가(묵적)의 기록이 발견되어 뒤늦게 묵가사상이 새롭게 재조명된 것이다. 

묵가 사상은 원래71편으로 되어 있었으나 18편이 산일되고 현재는 53편만 남아있다. 

이를 요약하면 
①상현(尙賢 :현명한 사람을 숭상해야 한다)
②상동(尙同 :윗사람을 높이 받들어야 한다)
③겸애(兼愛 :모든사람을 차별없이 사랑해야한다)
④비공(非攻 :침략전쟁을 금지해야 한다)
⑤절용(節用 :재정지출을 아껴야 한다)
⑥절장(節葬 :장례를 간소화해야 한다)
⑦천지(天志 :하늘의 뜻을 따라야 한다)
⑧명귀(明鬼 :귀신이 존재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⑨비락(非樂 :사치성 음악을 금해야 한다)
⑩비명(非命 :주체적 노력에 반하는 숙명론을 금해야 한다)이다. 

이러한 사상을 철저히 실천에 옮김으로써 민중의 호감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묵적은 말에 표준을 강조하면서 말에 표준이 없으면 물레 위에서 동쪽과 서쪽을 확립하려는 것과 같아서 옳고 그름,  이로움과 해로움에 대해서 분명히 알 수 없게 되므로 말에는 표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역사적 표본(歷史的 標本)과 경제적 근거(經驗的 根據), 현실적 유용성(現實的 有用性)이라면서, 

역사적 표본(歷史的 標本)은 옛날 성왕(聖王)들의 사적(史蹟)에서 찾아야 하고 경험적 근거(經驗的 根據)는 백성들의 귀와 눈으로 듣고 본 사실에서 찾아야 하며 현실적 유용성(現實的 有用性)은 형벌과 정책을 시행하여 그것이 국가, 백성, 그리고 인민의 이익에 부합되는 가를 살펴보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이어 '치어신자 중인부지기공, 쟁어명자 중인지지 (治於神者 衆人不知其功, 爭於明者 衆人知之: 현명하고 성스럽게 다스리면 사람들은 그 공을 알지 못하고, 드러내고 다투면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준다.)'라며 '현명한자의 다스림은 사람들의 눈에 잘 드러나지 않아 그 공을 잘 모르나 공명심이 많은 자의 다스림은 자신이 영웅인 것처럼 드러냄으로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된다'는 뜻 (초나라의 침략을 막아 낸 묵자가 송나라의 성으로 돌아왔을 때 성을 지키던 병사들이 문도 열어 주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과 

'유력자질이조인, 유재자면이분인, 유도자근이교인(有力者疾以助人, 有財者勉以分人, 有道者勸以敎人: 힘 있는 사람은 재빨리 남을 돕고, 돈 있는 사람은 힘써 나누어 주고, 도를 깨우친 사람은 남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하고, '관무상귀,  이민무종천(官無常貴, 而民無終賤: 관리라고 해서 언제까지고 고귀하지 않고, 백성이라고 해서 끝까지 비천하라는 법은 없다.)'이라면서 사람에게는 귀천이 따로 없으니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삼가 겸손한 삶을 살라고 한 것이다. 

그는 공자가 주장하는 '仁'을 '별애(계층적 차별적 사랑, 차별애)'라 규정하고 이를 배척하였으며  '겸애'(보편적 평등적 사랑, 무차별애)를 주장했다. 

또 인간의 행동여하에 따라 상벌과 화복을 주는 하느님(天主)과 귀신(明鬼)의 존재를 믿으며 하늘의 뜻(天志)을 받드는 등 기독교의 교리와 유사한 사상과 선군 정치(빈부귀천에 구애받지 않고 도덕적이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지배하는 정치체제)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철저한 실천을 중시함으로써 제자들이 전투에 참여하여 몰살함으로 후대가 끊겨버린 것이다. 모든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정책 중의 하나는 서민을 위한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요순시대이후 자고로 그렇게 펼쳐진 적이 없었다.  단지 힘 있는 권문세가들이 역사를 좌지우지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게 요리해 왔을 뿐이다. 

따라서 묵가의 사상은 서민들의 큰 반응 속에 두각을 나타냈으나 결국은 한나라의 통치세력들에 의해서 외면을 받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면면히 민중의 가슴속에 내재되어 흘러오다 20세기가 되어서야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 서양에서는 피타고라스의  '만물의 근원은 수'라는 이론은 잘못된 것이며  '만물의 근원은 수'가 아니라 '불'이라면서 헤라클레이토스가 등장한다.

대설인 오늘도 귀감이 되는 묵가의 사상을 잘 헤아리는 행복한 하루가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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