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윤리적 게으름뱅이의 파괴적 땡깡

며칠 전 어느 30대 중후반의 남성이 21년전 자신을 폭행한 교사를 살해한 뉴스가 났다. 이 기사가 나자 네티즌들의 반응은 흔치 않을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13일 현재 약 2297개의 댓글이 달렸다.

글 내용의 대부분은 그 살해한 남성에 대한 감정적 동정과 자신도 죽이거나 복수하고 싶은 교사가 있다는 글, 온갖 직간접으로 경험했던 교사에 의한 범죄적 피해 글들로 메워져 있었다.

무엇이 어찌됬건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그러나 왜 그토록 수많은 교사들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쉽게 넘을까? 그러고도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또 습관적으로 그러한 폭력을 휘두를까?

이러한 범죄적 행태가 만연하는데 눈감고 있는 정부는 제대로 된 정신일까? 정부의 책무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 기본도 이행할 의지가 없는가? 이러한 범죄적 방만은 건국이래 수십년 아닌가?

먼저 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사회에선 온갖 권력 불균형에 의한, 권력 남용은 제1차로 감시대상이 되고, 그 권력이 견제받는 환경을 매우 치밀하고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 감시대상이고, 또 남용사건에 대해선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심각하게 다루는 것이 민주사회의 기본 이념에 맞는 행위이다. 그러나 한국의 교사들은 이러한 기본이념 위에 군림하는 특수 집단들이다. 이는 교사집단 뿐만이 아닌 공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또 얼마전 어느 공기업에 다니는 비흡연자 여직원이 사무실내에서 흡연하는 남자직원의 비율이 대부분이기에, 개념없이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현상 때문에, 고초를 토로하는 글이 포털싸이트에 올라왔다. 그 여직원은 담배연기에 약해서 몸에 부정적인 반응이 일어나 약가지 먹어가며 담배연기와 싸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글에 올라온 후 사실 이렇게 황당한 피해 경우는 다른 회사에서도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일임을 알 수 있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책임감 없고 비윤리적인 태도를 취하고, 그만한 윤리가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컨트롤 할 수없는 크기의 권력을 부여받는가?

그러한 권력남용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행복한 삶이 마구 파괴되는데 이에 대해 문제의 심각성을 못 느끼는 상황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이러한 민주가치에 위배되는 권력을 가진 자의 권력 남용은 어떻게 제어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일까?

필자가 보기엔 학교에서도 그렇고 공기업에서도 그렇고 모두 그러한 부당하고 비윤리적 저질태도를 징계하는 제도는 만들어 놓았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문제는 수십년 동안 한번도 제대로 작동해본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문제의 가장 근본적 해결방법은 그들에게 주어진 부당한 권력을 빼앗아 오는 수 밖에 없다.

곧 정규직이라 웬만한 잘못 아니면 짤릴 일이 없으니, 자신의 감정적 사고로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낮은 윤리를 가져도 아무 문제가 없기에 그토록 저질의 윤리와 범죄적 행동도 마구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만약에 그 사무실에서 담배피는 공기업 매니져와 폭력교사가 애당초 비정규직이었으면 그런 짓거리를 할 수 있었을까? 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렇게 비정규직화 됨으로써 사회 각계에서 언제든지 적합하고 높은 윤리를 가진 사람들이 쉽게 대체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면 과연 그들이 그런 타락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모든 권리, 권한, 권력은 그 크기가 클수록 더 큰 윤리를 요구한다. 이것이 없을 땐 그 권력의 크기가 클수록 더 큰 재앙을 일으킨다. 이렇게 보았을 때, 지금 현재 그 많은 공무원들이 정규직일 필요가 없다. 이렇게 정규직이기 때문에 스스로 덜 발전하여도, 비루한 논리로 복지부동을 해도,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조직논리로 나가도 윤리적으로 책임의식을 별로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이는 조직, 그리고 사회 동시에 개인의 발전에 있어서도 유감스런 일이다. 그러면 비정규직이 많아지면, 비정규직이라 쉽게 해고되면 그 사람은 생계가 막히는가?

절혀 그렇지 않다, 어차피 노동 인구의 유동성이 높아졌으므로, 자신이 좀더 자기개발에 힘쓰는, 자기 자신에 대한 더 높은 윤리의식을 가짐으로써, 더 매력적인 인력이 될 수 있는 것이고, 또 새로 들어간 조직에서도 더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조직을 위해서 일하고 자기 개발에도 힘쓰는 등 자기자신에 대한 윤리 뿐만 아니라 집단에서도 더 높은 윤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이 평소에 깨여서 보다 풍부한 인생을 살게 되면(정신이 깨인 자가 같은 시간을 살아도 더 오래 사는 것이듯)그 산업에서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기게 된다. 그리고 사업을 통해 시장에서 더 높은 윤리를 가지도록 요구받는다. 한 인간의 삶이 자주적으로 사업을 하며 또 보다 많은 도전으로 더 발전되고 성장하는 인생이 신에 뜻에 맞는 이상적인 삶의 형태일 것이다.

그러면 정규직은 누구에게 주면 되는가? 말 그대로 키, 핵심인력으로써 이사람 아니면 우리 회사는 못 돌아간다, 하는 핵심기술, 기능인재만, 다른 회사보다 더 좋은 대우를 함으로써 조직에 대한 충성도를 갖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개나소나 정규직이라, 정작 키 핵심인력이 받아야 할 인센티브를 전폭적으로 받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더 나아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 자기사람에 대한 대우를 마땅히 받고, 그 밖에 사람들은, 괜스리 정규직 대우를 받음으로써 잘못된 메시지를 받게 되서도, 과도한 권력을 부여 받게 되서도 안된다.

대학에서도 이미 핵심적 강의, 수준있는 강의의 대부분은 비정규직인 강사 등에 의해 되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현 한국 제도권 교육의 처참한 질은 마땅히 비정규직화로 풀어야 한다. 그래야 민주사회의 기본 가치를 수호하게 되는 것이되고, 사회에 유용한 지식, 앞선 지식과 기능을 가진 사람이 교육계에서 사회에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앞선 지식이 보다 많이 생겨나고 또 이것이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것, 여기에 성공한 사회가 경쟁력 있는 사회가 되기에 훨씬 유리한 충족 요건을 가지게 된다.

특히 정규직이 많아지면, 국민 경제와 국가의 부에 더 긍정적 역할을 끼치는 사업활동에의 의욕을 감퇴시킨다. 이미 많은 자영업자들이, 차라리 꼬박고박 안정적으로 짤릴 위험도 적고 월급받는 직장인을 부러워하는 것은, 이중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로, 사업의욕을 감퇴시키며, 둘째로, 개인의 보다 넓은 차원에서의 성장의욕도 고무시키지 못한다.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사업의욕이 적은 반면 미국이나 중국의 젊은이들이 하늘을 찌를듯한 사업의욕을 가진 것은 심각하게 바라보고, 과연 어떤 토양이 한국 젊은이들의 성장의욕을 키우지 못하는가?를 눈을 부릅뜨고 찾아내 해결해야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도, 기업들이 보다 현실적인 대우를 하고, 개인에게도 보다 높은 윤리수준과 자기 발전을 도모하게 되는 신자유주의의 비정규직화 양산은 새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오해에 대한 더 구체적인 논설은 이달 말 필자의 저서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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