껌의 역사는 기록상으로는 AD 2세기경 멕시코의 마야족 동굴벽화에 무언가를 씹는 모습이 있으며 이후 마야족의 멸망으로 일부 아메리칸 인디언들에 의해 나무의 수액으로 껌과 비슷한 것을 만드는 방법이 전해져 왔다.

우리나라는 주한미군의 주둔 이후 껌에 대한 폭 넓은 수요가 일어 났으며, 1956년 순수 국내 기술로 해태제과에서 『해태 풍선껌』을 제조한 것이 우리나라 츄잉껌의 시초라 할 수 있겠다. 

껌을 만들기 위한 껌 베이스 또한 1986년 부터 완전 국산화가 이루어져, 현재에는 모든 해태 츄잉껌에 사용 되어지고 있다.

미국 껌의 대명사는 '리글리 껌' 이지만, 윌리엄  리글리(William Wrigley Jr. 1861∼1932)가 껌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리글리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껌을 본격적인 상품으로 만들어 거부가 된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리글리는 시대의 우연한 행운아가 아니었다.   

그는 '경품'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 해 내고, 식사 뒤 껌 씹는 유행을 탄생시킨 판매전략의 천재였다. 윌리엄 리글리는 소년시절 악동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비누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일을 돕던 중 판매에 대한 스스로의 자질을 확인하였다. 

13세 때 리글리는 내심 못 미더워 하는 아버지를 설득한  끝에 비누 판매 여행을 떠났다. 리글리는 예상 외로 판촉활동을 잘했다. 더구나 그의 판매 비결이 공손한 태도와 끈기에 있었기 때문에 부모는 더욱 놀라워 했다. 

말썽쟁이 악동이 예절 바른 세일즈맨이 되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으나, 그의 판매실적은 나날이 늘어갔다. 최초의 판매에서 리글리는 대단한 끈기를 발휘했다. 그가 외판원 자격으로 처음 방문한 곳은 펜실베니아 주 웨스트체스터 였는데 그는 이 곳에서 아주 깐깐한 상인을 상대로 판매전을 벌이게 된다. 

리글리는 '개시 상품'이니 팔아달라고 정중히 부탁했으나 상인은 바쁘다며 일언지하에 거절 했다. 하지만 2시간에 걸친 리글리의 끈질긴 설득에 못이긴 상인은 마침내 선언했다. 

"이봐! 어린 친구! 내가 오늘 다른 일을 하자면 자네  비누를 사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군!" 

이 판매를 통해 리글리는 사회 활동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되었으며 일을 통해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얼마 후 리글리는 유난히 고집 센 시골 도매업자와 비누 판매를 놓고 맞붙게 되었다. 이때 리글리는 엄동설한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그 도매업자의 집 앞에 텐트를 치고 밤을 새운 결과 마침내 비누 주문을 받아 내고야 말았다. 

리글리가 얼어 죽을 것을 염려한 나머지 상인이 그의 요청을 수락한 것이다. 리글리는 끈기와 더불어 사교성도 풍부했다. 비누 주문을 성사시키려고 상담을 벌이다가도 실패하면 언제나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어 고맙다는 인사말을 상대방에게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리글리의 이 같은 공손함에 감탄한 나머지 일단 구매를 거절했던 상인들도 잠시 후 생각을 바꾸어 주문을 해 오곤 했다. 리글리의 끈기는 결코 '무식한 돌진'이 아니었던 것이다. 리글리는 훗날 판매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판매의 요체 가운데 하나는 언제나 예의 바르고 참을성을 발휘 하며 절대 쓸데없는 논쟁을 하지 않는 것이다."
  
20세가 되었을 때 그는 벌써 빈틈없는 장사꾼이 되었으며 아이디어를 접목하는 재능을 보여 주었다. 리글리는 판촉활동 강화를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하던 중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경품이었다. 오늘날에는 판촉 강화의 일환으로 경품을 제공하는 일이 흔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그런 상행위는 전혀 없었다. 

즉, 경품은 리글리가 최초로 고안한 판촉 행위였던 것이다. 경품을 붙여 파는 방법을 시도한 결과는 의외로 대성공이었다. 

1891년, 30세가 된 리글리는 심각하게 독립을 검토했다. 언제까지 아버지의 일만을 대신하고 싶지는 않았다. 더욱 이 판매에는 자신이 있었으며 독자적 판매점을 갖고 싶기도 했다. 독립이 두려운 일이기는 했지만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글리는 마침내 시카고에 비누 판매 대리점을 개설하면서 독립했다. 첫 상품은 아버지가 생산한 비누였다. 그 해 리글리는 비누 한 상자당 베이킹 파우더 한 봉지를 제공하는 경품판매를 실시했다. 

이듬해(1892)에는 부수적 상품으로 베이킹 파우더를 팔면서 경품으로 껌을 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껌에 대한 반응이 좋았다. 

1892년 밀가루 한 포대마다 껌 두 개를 경품으로 주었더니 채 몇 달이 되기도 전에 고객들은 베이킹 파우더 말고 껌만 팔 수 없느냐고 자주 문의를 해 왔다.  이 무렵 다른 상인들도 경쟁적으로 경품을 붙여 팔기 시작했으므로 리글리의 판매 이윤은 많지 않았다. 

리글리는 또 한 번 결단을 내렸다. '껌은 신통치 않은 과자인데 어째서 소비자들이 찾을까? 사기에는 망설여지는 상품이어서 그럴까? 어른들의 마땅한 군것질이 없기 때문일까? 

그래, 분명히 껌의 존재 가치는 있는데 그 필요성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걸 거야! 내가 껌의 필요성을 개발해 내어 상품화해서 팔아 보는 거야! 실로 껌의 왕' 으로서 대성공 하게 될 계기를 이루는 순간이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리글리는 이렇게 회고했다. "어쩌면 이것이 세계적으로 발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무슨 확고한 신념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어쩐지 껌 속에 그렇게 느끼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 해 말, 리글리는 다른 모든 상품을 정리하고 껌만 파는데 주력했다. 그는 전국을 돌며 특유의 설득력으로 잡화상 진열대 마다 자신의 껌이 놓이게  했다. 껌에 손 댄 첫 해에 리글리는 열차 속에서 1백 87일을 보낼 만큼 정력적으로 뛰었다. 

또한 리글리는 판매 촉진책의 일환으로 자신의 껌을 15달러어치 이상 사 주는 모든 상인들에게 저울 하나씩을 선물했다. 저울에 이어 주문 규모에 따라 시계, 커피 분쇄기, 낚시도구 같은 경품을 주었다. 이런  혜택에 힘입어 상인들은 이왕이면 리글리 껌을 소비자에게 권하기 시작했다.

리글리의 이윤은 형편 없었지만 시장 점유율은 날로 높아 갔다. 요즘 기업들이 사용실적에 비례하여 사은선물을 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전적으로 리글리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리글리는 상인으로 부터 주문을 받을 때 매우 대담한 정산방식을 택했다. 즉 첫 거래를 할 경우 원하는 양을 그대로 보내주고 판매 대금에 대한 재촉을 하지 않았다. 

보내 주면 받고, 안 보내 주면 그만 이었다. 그러나 다음 주문이 오면  반드시 지난번 거래 대금에 대한 청산이 끝나지 않는 한 상품을 보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껌 백통(갑)을 보냈다 하면 혼자서 다 먹진 못 할 것이다. 반드시 팔았을 것이며, 여러 사람이 씹었을 것이다. 그러면 결국 선전이 되는 것이니 껌 백 통의 값을 떼인다 하더라도 선전비로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의 상술은 적중하였다. 확실한 주문자가 이 무언의 광고로 늘어 났으며, 리글리에 대한 신뢰와 애정도 커져 갔다. 리글리는 또 하나의 혁신적 판매술을 창안했다. 각 음식점의 계산대 옆에 그의 껌을 진열 함으로써 식사를 하고 나오는 손님들의 눈에 금방 띄게 한 것이다. 

이 판매술은 적중해서 식사를 마친 손님들은 습관 처럼 껌을 씹게되었다. 리글리가 퍼뜨린 이 유행은 곧바로 미국전역의 식당으로 확산되었으며 계산대 옆의 껌은 식당을 찾는 고객들의 인기를 끌었다. 

현재 우리나라 많은 식당에서는 껌이나 사탕 또는 요구르트를 식사 마친 손님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리글리의 아이디어를 응용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잘 활용하여 아이디어맨이 되는 목요일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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