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말 청초시대에 오삼계(吳三桂)란 장수가 있었다. 후대인에게는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 의 중국 점령을 도운 반역자로 치부되고 있지만 오삼계는 집안 대대로 무장을 낸 명문가 출신이다. 

부친 오양도 유명한 장군으로 1612년 아버지의 근무지인 요동에서 태어났다. 장성한 오삼계는 오양의 공적 덕에 무장으로 등용되어 출셋길을 달렸다. 당시 요동에서 만주족이 흥기하여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다. 1641년 제독에 임명된 오삼계를 만주족을 막는 중요 임무를 맡게했다.   

근무지인 요서의 닝위안(寧遠) 으로 떠나기 전 오삼계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바로 중국 역사의 운명을 가른 진원원(陳圓圓)이다. 진원원은 명기(名妓)로 외모 뿐 만 아니라 춤과 노래가 뛰어나고 재주도 많았다.

숭정제의 총애를 받던 전비(田妃)가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사람을 내려 보내 진원원을 불러 들였다. 진원원은 곧 숭정제를 매료 시켰지만 지나친 미모와 요기가 문제였다. 황제의 옥체를 망칠 수 있다는 어의들의 간언으로 숭정제는 진원원을 오양에게 주었다.  

오양은 본인이 이미 늙은 데다 아들이 진원원을 마음에 두고 있어 오삼계에게 넘겼다. 황궁에서 벌어진 연회석상에서 본 진원원에게 반했던 오삼계는 크게 기뻐했다.

오삼계는 진원원을 바로 첩으로 삼고 황제에게 충성을 다짐하며 근무지로 떠났다. 명나라가 오삼계를 닝위안으로 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닝위안에 위치한 산하이관(山海關)이 요동에서 베이징으로 통하는 군사 요충지 이자 최후의 방벽이었기 때문이다. 

오삼계가 닝위안으로 떠난 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이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 농민군의 기세는 들불같아 수 개월만에 베이징을 함락시켰다. 

숭정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오양 등 대신들은 이자성에게 항복했다. 아버지와 가족이 농민군 수중에 떨어지자, 오삼계도 이자성에게 투항하려 했다. 하지만 이자성이 오양을 참수하고 휘하 부장인 유종원이 진원원을 강탈하자 오삼계는 마음을 바꿨다.  

오삼계는 바로 만주족에 투항해 산하이관을 열었다. 오삼계와 만주족이 몰려오자, 이자성은 베이징을 탈출하며 오삼계 일족을 몰살시켰다. 더욱 분노한 오삼계는 이자성을 끝까지 추격하여 농민군을 말살시켰다.

명의 장군에서 청의 공신으로 신분이 바뀐 오삼계는 중국 서남부에 남은 명의 잔존 세력을 소탕하는 데 앞장섰다. 청나라는 오삼계에게 윈난의 행정군사적 전권을 일임했다. 이 권한을 이용해 오삼계는 윈난과 인근 구이저우(貴州)에 독립적인 번국(藩國)을 세워 통치자로 군림했다.

오삼계가 진뎬을 재건한 데에는 연인인 진원원을 위해서였다. 번왕이 된 오삼계는 독자적인 왕국을 꾸리고 왕궁을 세웠다. 진뎬은 높이 6.7m, 너비 7.8m에 달하는데 모두 청동으로 지어진 전각이다. 기둥, 지붕, 문 등이 청동으로 무게가 200톤을 넘는다.

건물 안에는 신선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오삼계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이다. 대들보에는 쿤밍의 아름 다운 풍광을 찬양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진뎬은 청동으로 만든 중국 4대 동전(銅殿) 중 하나로 역사적 가치가 뛰어나고 보존상태가  완벽하다.

진뎬을 만들만큼 오삼계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오삼계는 왕이 된 뒤 왕비로 다른 여자를 세우고 여러 명의 첩을 두면서 진원원을 멀리했다. 진원원도 곡절 많은 인생에 무상함을 느껴 출가해 비구니가 됐다.

뒷날 강희제가 철번정책을 단행하자 1673년 오삼계는 상가희, 경정충과 함께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 황제 자리까지 오르지만 1678년 병으로 죽었다. 오삼계 사후 삼번의 세력은 약해져 1681년 멸망했다. 후대인들은 오삼계가 진원원 때문에 명나라를 배신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진뎬 은 이런 오삼계와 진원원의 애정사가 숨어 있다.

중국역사 중 한 장수의 사랑이야기 이지만 정치적인 부분과 많은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도 주위의 사랑하는 분들에게 실망 시키지 않는 화요일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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