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와 놀부는 형제간이면서 매우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동화 나 설화가 그렇듯이 이야기 속의 부자는 자린고비 이고 남을 위할 줄 모르고 심지어는 99섬의 벼를 가지고 100섬을 채우기 위해 한 섬의 벼를 가진 가난한 사람을 못살게 구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진다. 어릴 때부터 흥부와 놀부는 “흥부는 착하고 좋은 사람”, 놀부는 “심술이 고약하고 못 된 사람”으로 배워왔다. 

사농공상과 반상의 차별이 뚜렷하였던 봉건시대의 상황은 권력과 돈을 하나의 묶음으로 볼 수 있다. 즉, 권력과 부는 하나로 맺어져 있으며 이를 뒷받침 하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의 희생이 필요한 시대 였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간접적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흥부전과 같은 이야기를 썼으리라. 어찌되었던 흥부전은 당시의 눈에서 보면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였으리 라. 이 당시에는 건전한 자본주의란 있지도 않은 시대였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만의 하나, “입신양명”을 하거나(대표적인 인물 허준) 도적질을 하거나(임꺽정이 대표적인 인물, 실패는 했지만), 아니면 흥부처럼 누군가가 박씨를 가져다 주는 행운을 잡는 방법 이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암울한 현실은 이야기로 표현되고 그 속에서 나름 대로의 울분을 달래는 방법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 으리라. 흥부전을 읽어주면서 아이에게 누가 더 좋은 사람인지 물어본다면 당연히 흥부라고 대답 할 것이다. 놀부가 나쁜 사람으로 비추어지는 것은 남보다 하나 더 가진 심술보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놀부의 심술보는 사실상 돈이 많아서 생긴 것은 아니다. 원래 그런 성격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자에게 심술보가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놀부라는 성격에 심술보가 달려 있는 것이다. 

부자와 심술보가 하나로 맺어지면서 부자는 남의 돈을 빼앗거나 남을 못살게 구는 사람으로 비추어 지는 것이다. 심술보가 없는 놀부를 상상해보자. 그리고 착한 흥부와 비교한다면 누가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나? 

흥부의 자녀는 서른 명이다.(좀 과장되지만 원전에 그렇게 나온다) 아마도 쌍둥이를 많이 낳았나 보다. 젖을 빠는 간난아기에서부터 장가보내 달라는 다 큰 아이들이 한 방에서 한 이불을 덮고 살고 있다. 상상해보라! 자기 땅 한 뼘 없는 흥부가 먹여 살려야 할 아이들이 서른 명 이라니…… 

더욱이 다 큰 장정들도 장가보내 달라는 이야기는 하면서도 자신이 어떻게 일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도 못하다. 가족 모두가 누군가가 일을 해서 자신을 먹여 살려 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형인 놀부의 입장에서 흥부를 바라보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집에 쌀 한 됫박을 얻으러 온 흥부에게 놀부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내가 너에게 좋은 옷을 주어봐야 서른 명을 어떻게 입힐 것이며, 쌀 한 됫박을 주어봐야 서른 명이 얼마나 먹을 것이냐” 물론 도와주지 않으려고 하는 핑계를 대는 목적이 있긴 하지만 만약 놀부가 쌀 한 됫박이 아니라 한 섬을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며칠이 지나면 같은 일이 반복되리라는 것은 안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정말 큰 잘못은 가지고 안도와 주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 자체이다. 많이 가진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자선의 의미도 있지만 자신의 부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기 도 하다. 그런대로 현대의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것은 소수의 부자가 세상 돈의 대부분을 독식하면서도 자선이라는 이름으로 베풀고 있기 때문이리라. 놀부의 박씨에서 나온 것들이 놀부의 재산이 많다는 이유로 놀부를 괴롭힌 것이 아니다. 가진 자의 심술에 대한 응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재테크의 측면에서 흥부전이 재해석 되어야 할 이유는 우리 아이들에게 부자=나쁜 사람 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제 아이에게 흥부전을 읽어줄때 놀부가 나쁜 사람이라고 등식화 하지말고 놀부처럼 부자가 되면 그렇게 살지 말라는 쪽으로 아이를 가르치자. 그러면서 흥부의 삶에 대하여도 간단하게 이야기 하자. 만약 흥부에게 박씨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 을까? 박씨가 없다면 우리 아이들은 어떤 느낌을 가질 것인가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수 있게하자. 

흥부전을 읽게되면 찰스 디킨즈의 소설 “크리스 마스 캐롤” 속의 구두쇠 스크루우지가 떠오른다. 그런데 스크루우지의 이야기와 흥부전의 큰 차이점이 존재한다. 놀부는 못된 심술보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는 것으로 종말을 맞이하는 반면 스크루우지는 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에게 나누어 준다. 

이것이 동양과 서양의 돈에대한 인식의 차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비약하는 것일까?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조선 후기 판소리계 소설로 흥보전• 박흥보전(朴興甫傳)• 놀부전• 연(燕)의 각(脚)• 박흥보가• 흥보가• 놀부가• 박타령 등으로도 불린다.

<흥부전>은 조선 후기 서민사회에서 광대•가객 등 서민 예능인들에 의하여 형성된 작품이므로 당시 사회의 다양한 모습과 작품을 생성시키고, 향유했던 서민계층의 의식이 잘 투영되어 있다. 특히, 두 주인공인 흥부와 놀부는 당시 서민사회의 일정한 신분적 특징과 유형을 반영하는 전형적 인물로 투영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흥부와 놀부는 같은 형제이면서 도 양반과 천인으로 그 사회적 신분이 상이하게 설정되었다고 보아, 그 이유를 판소리계 소설의 중요한 특징인 부분의 독자성에 기인한다고 보며, 작품의 사회사적 의미를 화폐경제의 발달, 천부(賤富)의 대두와 물질적 가치관의 성행에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또, 이와는 달리 흥부와 놀부의 신분관계를 같은 서민층에서의 양면성을 반영했다고 보고, 놀부는 요호부민(饒戶富民)의 반영인 반면에, 흥부는 소작의 기회마저 얻지 못하고 모든 생산수단을 상실하여 품팔이꾼으로 전락한 영세농민을 반영한 인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견해차가 있어도 '흥부전'이 당시 서민사회 의 양상을 반영하고 있고, 서민계층의 삶과 생각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흥부전>은 대체로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한 윤리소설로서 인과응보적 권선징악의 주제와 사상을 지닌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교적 윤리도덕을 내세우는 것만이 <흥부전> 주제의 전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 이면에는 당시의 급변하는 현실사회에서 몰락 한 양반과 아직도 위세를 부리려는 기존 관념이 허망한 것이라는 현실주의적 서민의 새로운 세계관의 제시에도 '흥부전'의 주제는 발견됩니다.

흥부와 놀부를 상상해 보며 세상엔 거저 얻어지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가진자는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써야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없는자는 왜 없이 사는지를 깨달아야 만이 참다운 삶을 살아 갈 것입니다. 오늘도 현명한 삶을 영위하시는 월요일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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