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인간 적인 면모가 훌륭했을 뿐 아니라 대중 정치가로서 충족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예부터 동양에서는 훌륭한 지도자의 조건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 : 신체조건, 말 솜씨, 글씨쓰기, 판단력)을 말했다. 

여운형은 이런 조건을 충분히 구비한 사람이다. 그는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충분한 물적 지원을 받으며 교육을 받았다. 명석한 머리로 진보적 학문을 일찍이 깨쳤으며, 한학과 영어를 골고루 터득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영어회화에도 능통했고 웅변술에 뛰어났으며 사람을 대할적에 인정이 넘쳤다. 잘생긴데다가 세련된 멋쟁이였고 게다가 기지와 제스처에도 능란했다.

여운형은 중단 없는 민족운동가였고 목숨을 바쳐 민족을 사랑했으며 언제나 남보다 한발 앞서 사람들을 이끈 탁월한 지도자였다. 늙은 나이에도 이웃집에 사는 여고보생이 남학생들에 시달리자 그 남학생들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협기를 보이기도 했다. 

또 이화여자전문대학 학생인 이태영(李兌榮)이 웅변대회에서 여성의 평등을 주장하는 당찬 여 학생이었으나 아버지가 없음을 알고 양녀로 삼은 정감이 넘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서울역 노동자들의 주례를 서느라 온통 시간을 빼앗기면 서도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 정도의 인물이 왜 해방공간에서 실패를 거듭한 끝에 암살을 당하고 말았을까? 그는 과연 이상주의 자로 현실과 유리된 노선을 걷다가 좌절한 것일까?

여운형은 경기도 양평 신원리에서 대대로 벼슬을 누리던 부잣집 양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0대 중반에 한문수업을 중단하고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개화소년이 되었다. 을사조약 이후 그는 국책보상운동에 나서기도 하고, 일제 반식민지 상태에서 민중을 깨우치기 위해 곳곳에서 대중 연설을 하기도 했다. 국채보상운동으로 단연(금연) 운동이 일어났을 때 담배를 끊고 평생 다시 피우지 않는 결단을 보였다.

그는 21세에 아버지가 사망하여 상속을 받았는데, 맨 먼저 빚 받을 문서와 노비관계의 서류를 불태워 버렸다. 그는 종들을 모두불러 “너희들은 이제부터 나의 형제요 자매들이다”라고 외치고 각기 살길을 마련해 주었으며, 혼인하지 않은 종들은 짝을 맺어 주었다. 평생 농민과 노동자를 사랑하던 모습이 이때부터 나타났다.

여운형은 자신의 집 사랑채에 학교를 세워 신교육 운동에 나서는 한편, 상동교회에 들어가 전덕기 목사와 이동녕, 이회영 등의 명사들과 접촉했다. 

그는 기독교에 들었으나 남의 신앙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1914년 그는 활동무대를 국외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상해로 갔다. 그리고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金陵大學) 영문과에서 서양학문을 익히고 미국인 서점인 협화서국(協和書局)에 근무하면서 영어회화를 배웠다.

여운형은 상해에 망명해있던 신규식등과 교민단을 조직하여 그 단장으로 활동했다. 이어 신한청년 당을 조직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피압박민족의 사정을 설명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고, 자금과 선전자료를 얻기위해 서북간도와 시베리아 로 진출하기도 했다. 이때 그의 영어실력과 웅변술은 그의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 즈음 국내에는 3·1운동이 일어났고, 그 영향을 받아 상해에 임시정부가 태동되었다. 그는 처음 부터 임시정부 지도인사들과 마찰을 빚었다. 그는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하고 구황실을 배격해야 한다고 고집했는데, 대부분의 인사들은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하고 구황실의 우대를 주장했다. 

그가 ‘대한’이란 국명을 반대한 이유는 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을 승계하는 정신을 거부한 것이요, 구 황실의 우대는 공화정체를 추구하면서 이씨왕조를 받드는 꼴이란 것이다. 당시로서는 아주 진보적인 의식이었다. 이때부터 임시정부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때로 현실 대처에 이견을 드러냈던 것이다.

처음에는 임시정부의 외교위원을 맡기도 했는데 임시정부가 정부형태로 발전하자 입각을 거절하고 상해교민단장의 일만 보았다. 그는 이회영과 같이 정부형태보다는 운동단체의 육성을 더 강조했던 것이다. 그의 활동은 개인적이라는 비난을 받긴 했으나 대단히 폭이 넓고 화려했다.

여운형은 일본 척식장관(拓殖長官)의 초청을 받고 임정계 인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일본 고위인사들에게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특히 대중연설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는 연설이 끝난 뒤 청중들이 자연스럽게 “조선독립 만세”, “몽양 일행 만세”를 외치도록 유도했다. 일본 당국은 그를 초청한 것을 후회했으나 체포 할 수는 없었다.

상해로 돌아온 그는 임정과 관계없이 줄기차게 외교활동을 벌였고 중국 공산당에도 가입했다. 그가 기독교도가 된 것이나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민족운동을 위해 지원세력을 확대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런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1921년 김규식, 홍범도, 이동휘 등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遠東)피압박민족대회에 다녀왔고, 중국의 혁명세력인 손문에게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장개석주도의 중국국민당에도 가입했다. 이런 활동으로 그는 늘 테러의 위협을 받고있었다.

1927년 장개석이 공산당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감행한 뒤 중국 혁명세력은 공산당과 국민당으로 분열했다. 위기를 느낀 여운형은 장개석의 눈을 피해 일단 지하운동으로 활동을 전환했으며, 중국 학생들로 남양(南洋) 원정축구단을 만들어 싱가포르, 필리핀 등지를 돌았다.

이 무렵 그는 영국 제국주의를 공격한 탓으로 체포 되어 일본경찰에 의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제 그의 생애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목숨을 앗아간 통일의지 여운형은 국내에 들어와 3년동안 감옥에 갇혀 지냈다. 감옥에서 나온 그에게 일제는 감투를 주겠다느니 많은 이권을 주겠다는 따위로 유혹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그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겉으로는 서울역 노동자들의 결혼주례 같은 일에나 열중하는 듯이 보였으나 안으로는 중경의 임시정부와 연안의 조선독립동맹 과 연계를 모색하는 등 지하운동을 펼쳐 나갔다. 

많은 인사들이 친일파가 되어 날뛰는 시기, 그는 고고하게 변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손기정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된 뒤 그는 신사참배니 국방헌금이니 징병 권유니 따위 강요를 일체 거절하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그는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는데 그때 맹원이 1만여 명이었다고 한다. 또 비밀리에 농민동맹을 조직하기도 했다.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을 앞두고 혼란기의 치안을 유지하려면 무장력 확보가 시급하다고 보았고, 건국동맹 조직을 통해 이를 실현시키려 했다. 미래에 대처하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패망을 앞 두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는 그에게 조선의 치안에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긍정적으로 이를 수용했다. 그런데 미리 준비한 대로 조건을 달았다. 곧 정치범 · 경제범의 즉시 석방,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간섭하지 말 것 등이었다. 총독부를 대신해 치안을 맡겠다는 뜻이다. 다급해진 엔도는 거부 할 처지가 아니었다.

8·15 해방을 맞아 여운형은 재빨리 건국 동맹을 모태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자신이 위원장을 맡고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앉혔다. 건준은 치안대 조직을 확대해 8월 말경 전국에 걸쳐 145 개의 치안대 지부를 설립했다. 이어 건준이 모체가 되어 새로이 조선인민공화국을 발족시켰다. 

여기에는 이승만을 주석, 여운형을 부주석으로 추대했다. 우익이 임정추대운동을 벌이자 이에 대항하려는 수단이었다. 삽시간에 남한의 모든 지역에서 면 · 동 · 리 단위로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실시되고 이승만이 환국하자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는 강한 압박을 받아 무산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 적어도 주체적 정부수립을 계획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으며, 미군정의 피점령국 정책에 맞선 자주적 노선을 추구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좌우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광복절 주일인 오늘도 당당하게 아베정권에 슬기 롭게 헤쳐나가는 화요일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내일은 2부로 이어집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저작권자 © 인터넷조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