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뺏은 계유정난(1453) 의 모티브가 되는 사건이 명나라 때 일어나는데 이 사건이 바로 정난의 변(1399년) 이다. 이 사건은  연왕주체(후에 명나라 영락제)가 조카인 명나라 2대황제 건문제의 황위를 찬탈한 사건이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건국 이후 많은 개국 공신들을 제거한다. 아무래도 능력있는 과거의 동료들이 잠재적으로 그의 황위를 빼았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자신의 아들이 황제에 올랐을 때 그들에게 눌릴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개국공신들을 제거한 빈 자리를 자신의 아들들로 대신하게 하는데 그들에게 영지를 주고 왕으로 봉하여 그 영지를 다스리게 한다. 나중에 명나라 3대 황제가 되는 주체는 북평(북경) 지역을 영지로 받고 연왕에 봉해진다. 

개국 초기에 명나라의 수도는 남경(난징) 이었다. 북평은 북방 민족들의 침입을 수비해야 하는 지역이었으므로 연왕 주체는 휘하에 막강한 부대를 소유할 수 있었다.

주원장의 첫아들인 주표가 요절하여 그의 아들 주윤문이 주원장의 뒤를 이어 황위를 물려받으니 그가 곧 건문제이다. 이때의 대신들은 제태,  황자징,  방효유 등이었는데 각 영지에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왕들이 황제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하여 그들을 제거할 것을 건의한다. 

왕들은 주원장의 아들들로 건문제의 삼촌들이다. 건문제는 주원장과 마황후 사이에서 난  첫아들 주표의 아들이고, 연왕 주체는 주원장과 공비  사이에서 난 4째 아들이다. 주체는 문무를 겸비 하고 결단성이 있어 왕들 중에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왕들을 제거하기 위한 정책은 사실은 연왕 주체를 노린 것이다.

이를 눈치 챈 연왕 주체가 황제 주위의 간신들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먼저 난을 일으키니 이것이 정난의 변이다. 명나라 황실은 주원장이 개국공신을 모두 제거한 결과 뛰어난 장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초기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연왕 주체가 건문제를 쫓아내고 황제에 오르니 그가 명나라 태종 '영락제'이다.  

방효유는 황태자 주표의 스승이었던 당시 대학자  송렴의 문하로 이름을 날린 천하 지식인의 존경을 받는 대학자로 유가의 정통을 이었으며 산문가로 명성이 높았다. 그가 쓴 글은 간결하고 뜻이 분명하고 기풍이 호방하여 당대 즐겨 암송되었다. 

벼슬이 한림시강학사에 이르렀는데 현시대로 말하면 국립대학원 원장 정도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황제에게 궁중 강의도 하는 자리였다.  

연왕 주체가 남경을 점령했을 때 그는 상복을 입고, 건문제는 당시 불타 죽었다는 설이있다. 입궐하여 곡을하여 주체를 분노케 한다. 그것은 그의 주군이 건문제임을 나타내는 행위로 황위를 찬탈한 주체 입장에서 보면 반항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 

그러나 주체는 그의 책사 요광효가 방효유를 죽이면 천하의 학문이 끊긴다 하여 절대 죽이지 말 것을 건의하였기 때문에 그를 구슬려 자신을 섬기도록 하려고 한다.  

연왕 주체는 자신이 황위를 찬탈했더라도 방효유 같은 천하제일의 학자가 즉위 조서를 써주면 어느 정도 정통성을 인정 받으리라 생각하고 그에게 즉위조서를 쓰게 한다. 

그러나 방효유는 붓을 내던지며 죽어도 쓸 수 없다고 한다. 그에게 억지로 붓을 쥐어주고 다시 쓰게끔 하자 방효유가 쓴 글자는 단 4글자 였다.  연적찬위(燕賊簒位: 연나라 도적이 황위를 찬탈하다) 분노가 극에 달한 주체는 칼로 방효유의 입을 귀까지 찢는다. 

그리고 방효유의 10족을 주살 하는데 일설에는 주체가 방효유에게 즉위조서를 강요하면서 "네가 네 9족도 돌보지 아니할까"라고 하자 방효유는 "10족을 죽인다해도 쓸 수 없소" 라고 했다 한다. 그의 말대로 10족을 채우기 위해서 였을까! 있지도 않은 10족을 만들어 주체는 방효유와 관계된 사람을 모두 주살하는데 그 수가 847명, 혹은 873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9족이라 함은 아버지 일가의 4대, 어머니 일가의 3대, 아내 일가의 2대를 가리키는 말로 10족은 있지도 않은 것이었지만 주체는 방효유의 제자와 친구 등을 10족이라 규정하여 모두 죽였는데 방효유의 뜻을 꺽기 위해서 한사람 한사람 방효유 앞에서 처형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태연했고 마지막에는 취보문 밖에서 책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책형은 일반적으로 십자가형으로 알려져 있지만 명나라 시대에는 황제만이 내릴 수 있는 최고의 극형으로 일반적으로 능지처사(능지처참)로 불리 는데 우리의 거열형 형태로 행해진 능지처참과 다르다. 잔혹함으론 최고의 형벌이라 할수 있다. 명나라 때에 그 잔혹함이 극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시대에는 이 방효유를 모르는 선비가 없었다. 그는  절개와 충의의 으뜸으로 후대에 존경을 받고 청사에 이름을 길이 남겼다. 

그의 죽음을 듣고 송말 3걸의 하나인 문천상의 유명한 싯구절이 떠오른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 절개를 남겨 청사를 길이 빛내리라"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킨 것이 무엇일까.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게 해주었다. 나에게 그런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우리 대한민국에 이와같은 절개를 지닌 참 인사가 하나도 없단 말인가! 아쉽습니다.

몇년전 북한과의 실랑이 속에 참 대한인을 보았습 니다. 제대도 반납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위하여 군복무를 연장하겠다는 50여명의 젊은이들!
우리의 미래가 밝아 보입니다.
오늘도 5.000만분의 1의 역할을 하시는 슬기로운 화요일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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