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말기 대부분 사람들이 영적으로 깊은 잠을 자고 있을 때 유달리 일찍 세상을 향하여 눈을 뜬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과거에도 합격하기 전에 벌써 영어를 배워 미국과 가까이 지낼 때 친미파의 주동인물이 되었고, 세상이 변하여 러시아의 발언권이 강해지자 어느새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친러파의 중심인물이 되더니, 노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자 이번엔 유창한 일어를 앞세워 친일파의 거두가 되고 이어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했습니다. 

그 후 우리나라가 일본의 손으로 넘어갈 때 그는 서슴없이 일본인이 되어 일본 귀족으로 둔갑했고, 마침내 후작이라는 작위까지 받았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지만ᆢ 
아무도 그를 존경하거나 그를 성공한 사람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매국노’라고 부릅니다. 

그는 누구일까요?  바로 이 완용(1858-1926) 입니다. 그와는 전혀 다른 삶의 방향으로 자신의 부귀영화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 바쳐 지키고자 했던분이 있습니다. 지난 독립기념관 25주년 개관기념 투표에서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독립운동가’ 1위로 선정되신 분입니다. 

그는 바로 김구선생입니다. 그는 1867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949년 돌아가셨습니다. 1944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민주의원 부의장, 대한독 립촉성 중앙협의회 부의장을 지냈으며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상하였습니다.  

다음은 godpia.com 지식의 거장 “대가리 싸움 하지말고 발이되라! 김구편”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경찰서 열 개를 만드는 것보다 교회를 하나 세우는 것이 낫다”고 교회의 사명을 말하였습니다. 또한 “나는 깊이 믿고 깊이 사랑하는 기독교 정신을 반석으로 해서 튼튼한 조국을 건립할 방침이다. “ 라고 말하며 강한 나라를 세우려면 '성경 위에' 세워야 함을 호소하였고, 광복 후 민족의 당면 과제로 나라를 세우는 일(건국)과 교회를 세우는 일(건교)을  제시하였습니다. 

김구선생의 어머니는 겨우 17살에 그를 낳았고, 일주일이나 산통을 한 난산으로 결코 순탄치 않을 김구선생의 삶을 예견이라도 한듯했습니다. 

그는 당시 과거제도의 부정부패, 평생 가난의 대물림에 좌절하다가 우연히 동학을 알게 되었는데, 동학의 핵심 사상인 평등사상은 어린 시절부터 신분차별의 처절한 아픔을 겪었던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1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황해도 동학농민 전쟁의 선봉장으로 해주성 전투에 참여하였고, 참패한 후 전국을 떠돌며 여러 종교를 기웃 거리다가 서양인 선교사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평안도와 황해도에서는 예수교를 중심으로 신교육의 풍조가 일어났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주는 신교육은 놀라움 자체였습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서양 선교사들이 보여준 학식과, 차별 없이 나누어주는 지식과 교육의 기회,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열정은 신교육의 열풍에 휩쓸려 온 그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하늘과 사람을 동격으로 하는 동학에서는 해결 되지 않던 갈증이 있었으나, 하나님 아래의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랑받고 있다라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듣자 그 오랜 갈증이 해갈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 함께 존중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평등해지는 사회, 이것이 그가 그토록 바라던 세상의 모습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백범’이라는 호는 18번 고문에 7번 기절한 사건 으로 유명한 일명 ‘안악사건’ 이후에 지은 것입니 다. 일제가 합방을 전후한 시기에 장차 한국통치를 방해할 가장 부담스러운 존재로 기독교인을 지목 하고, 이를 제거하기 위해 조작해 낸 사건입니다. 

황해도 지방에서만 무려 160여 명의 독립투사 들을 체포했는데, 일본의 계획된 각본에 따라 사건을 날조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을 가해 피해자들에게 허위자백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문에 굴하지 않고 살아서 나온 김구선생은 자신을 낮추고 변절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백정과 범부의 첫 글자를 따서 호를 ‘백범’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당시 교회에 모인 성도들은 진실하고 또 절박 했습니다. 개개인의 삶이 절박해서 모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분명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이었지 만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의 안위보다 왜놈 손에 팔린 나라를 걱정했습니다. 그 땅에서 자라날 미래의 자손들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왔고, 나라를 위해, 미래를 위해 기도했고 진실로 나보다 남을, 개인 보다 나라를 위해 무릎꿇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기에 조국의 미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 조선을 버리지 않으실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김구선생에게 교회는 희망과 미래가 공존하는 곳.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 앞에 하나가 되는 곳이었습니다. 

김구선생은 “현재의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많은 국민들께 감히 부탁 드리건대, 이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사랑했던 숱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사람들은 저의 친구였고, 형제였습니다. 

이 땅을 사랑해서, 어떻게 해서든 지키고 싶어서 자신의 목숨도 아깝지 않게 내어놓은 선조들이 있다는 사실을 조금만 기억해 주시기를 이 자리를 빌어 간곡히 부탁 드리겠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복음의 능력을 회복함 과 기도입니다. 기독교는 국경이 없지만, 그리스도 인에게는 조국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민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았고, 모세는 민족의 승리를 위해 두 손을 뻗어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민족이 어려움을 겪었던 때마다 애국지사들은 한 손에는 성경을 쥐고, 또다른 한 손에는 태극기를 붙잡고 이 나라를 이끌고 한민족을 지켰습니다. 

고당 조만식, 우남 이승만, 월남 이상재, 남강 이승훈, 도산 안창호 등 여러 민족의 선각자들, 민족의 사표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나라와 민족을 향해 무한한 은혜를 공급해 주실것을 기대하며, 또한 이 땅에 1907년 평양대부흥의 재현을 사모하며, 피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이 꼭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은혜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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