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에 조국이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되고 해방 직후의 좌우대결의 혼란한 정국을 거치면서도 국가의 기틀을 바로 세워 1948년 8월 15일에 자유민주주의를 체제로 삼는 대한민국을 건국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천우신조(天祐神助), 하늘의 도우심이요 뜻 있는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한결같은 수고의 열매였다.

그러나 국가의 기틀을 미처 다지기도 전에 1950년 6월 25일에 김일성 군대인 인민군이 남침하여 온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게 되었다. 세인들의 판단으로는 이 나라가 공산화(共産化)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이 나라를 도우시고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력 아래 겨레를 사랑하는 민과 군이 똘똘 뭉쳐 나라의 기틀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이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유엔군이 참전하여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밀물처럼 밀려 내려오는 인민군을 막아낼 수 있었다. 김일성의 군대는 남한을 점령하여 공산주의 체제로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품고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유엔의 깃발 아래 국군과 국민들이 힘을 합하여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다. 6.25 전쟁에서 우리나라가 공산화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체가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역사였다. 뒤이어 4.19 혁명이 일어나고 우여곡절을 거치며 5.16 군사 혁명이 일어났다. 군사 혁명에 성공한 지도자 박정희 장군은 대통령에 오르면서 경제 개발에 도전하였다.

1961년 군사 혁명이 일어나던 해의 한반도의 남과 북의 사정은 몹시 어려운 처지였다. 남한은 경제가 어려워 미국의 원조로 국가 예산을 편성할 수 있는 처지였다. 당시로서는 북한의 경제가 남한보다 3배나 앞섰던 시절이다. 북한의 국민 소득이 240달러였고 남한의 국민 소득이 80달러로 아프리카의 가나 다음으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선포한 유신 헌법에 저항하여 성직자들을 규합하여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였다. 1974년 1월이었다. 시위 현장에서 중앙정보부로 잡혀가 고문도 받고 군사 재판에서 15년 형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인정하고 높인다. 박대통령의 공과 과(功과 過)를 판단할 때에 국가와 민족에 끼친 공이 훨씬 크다는 판단에서다.

그 점은 이승만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대통령 역시 독재로 흐른 치명적인 과(過)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우고 공산화를 막아낸 공(功)이 크기에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하여 마지않는다. 우리들 후손들은 이제쯤은 이승만 대통령의 공로를 재평가하여 국부(國父)로 모시는 절차를 밟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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