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들의 시대였던 바로크부터 19세기 낭만주의를 지나, 작곡가들의 걸작을 각자의 해석으로 연주하기 시작한 `연주자들의 시대` 20세기가 도래하게 됩니다. 

소련을 대표하며 '음악성'의 상징이 된 거장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 최고의 테크니션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쇼팽 스페셜리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소련의 강철 타건` 에밀 길렐스, 앙코르로 골드베르크 변주곡 전곡을 연주한 전설 빌헬름 박하우스, 클래식 마스터이자 재즈에서도 활약한 프리드리히 굴다, 명 작곡가이기도 했던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까지.. 

피아니스트만 하더라도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무수한 거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서유럽에서 전성기를 누린 작곡가들의 시대를 지나 동유럽 피아니스트들의 전성시대에서, 베토벤 협주곡 연주회로 13세의 캐네디언 천재가 뜬금없는 등장을 알립니다.


- 골드베르크 변주곡
글렌 굴드가 유일하게 두 번의 레코딩을 한 작품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주류 피아니스트로서 그의 탄생을 만든 `데뷔작`인 동시에 그의 사망 전 `은퇴작`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중 데뷔작 격이었던 스무 살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2019년 현재까지도 높은 판매량을 기록할 정도의 `명반` 혹은 `고전`에 등록한 음반으로 - 당시 평단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파격적 해석으로 인해 비평가들은 "미친 놈의 연주"라는 비난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 콘서트 피아니스트
스탈린 사망을 계기로 '철의 장막'을 거두기 시작한 소련공산당은 그러나 미국 피아니스트를 초청하는 것은 그 실용의 선을 넘는 것이었기에, 캐네디언인 굴드를 초청하여 이를 하나의 상징으로 공표합니다. 모스크바 연주회에서 그는 소련 인민들과 평단의 극찬 세례를 받고, 슈나벨과 함께 그가 유이하게 존경한 피아니스트 리흐테르와 공식 만남을 갖는 등 뜨운 환대를 받습니다. 특히 재즈와 함께 `서구의 퇴폐 음악`으로 당의 탄압을 받던 급진주의적 현대음악- 특히 쇤 베르크의 12음 기법 작품의 연주는 소련 음악계를 술렁이게 하고, 그렇게 굴드는 냉전의 침묵을 깬 최초의 북미인이 됩니다.

- 콘서트 은퇴
자신의 삶을 극적으로 구성하고 싶던 어린 천재는 늘 30세에 연주회를 그만두겠다 말해왔고 32세에 말을 실행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50세에 자신의 레코딩 기법을 `완성`하고 죽을 거라 예언해왔고, 스무 살 시절과는 전혀 달라진 해석의 두 번째 <골드베르크 변주곡> 레코딩을 50세에 발표한 며칠 후 사망합니다.(자살이 아닌 뇌졸중 급사였다는 점은 더욱 기이합니다)


그는 청중을 싫어했습니다. 자신을 음악의 구도자로 여기며 청중은 소음이나 만들어내는 방해꾼들- 연주자를 가학적 시각으로 짓누르는 이들일 뿐이었기에,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단 한 번의 승부'로 연주자의 모든 노력이 평가되는 연주회를 투우 쇼에 비유하며, 어느 연주회에서든 성공을 거둘 만한 몇 연주곡만 보유한 연주자들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이전에도 연주회를 수시로 취소해버렸던)그는 32세부터는 아예 한 차례의 연주회도 갖지 않는데, 대신 완벽한 레코딩을 위해 여생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이 사안에 있어서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인물로, 당시로서는 금기시 되던 각종 음향 효과를 입히고 발전시켜가며, 마찬가지로 금기시 되던 짜깁기 역시 서슴없이 손을 대 오직 `완벽한 음악`에 방해되는 모든 것은 불순물로 걸러버립니다. 아니, 애초부터도 그에게 금기나 청중들의 의견 따위는 자신의 음악에 상관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 취향
굴드는 쇼팽 바그너를 위시한 낭만주의 음악을 혐오했습니다. 감성보다 이성의 가치를 높게 여긴 그에게 낭만음악은 대중음악과 다를 바 없는 '감정 과잉의 덩어리'였으며, '세속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산물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그가 절대 바흐를 좋아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가 가장 좋아한 작곡가는 올랜도 기번스였으며, 그의 음악적 미니멀리즘을 사랑했습니다. 핀란드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북유럽적인 차가움을 사랑하기도 했고, 연주자들 역시 '악마적 기교파'와 '진중한 사유파'로 구분짓고 기교파 진영 연주자들을 비판했습니다.

- 연주에 대하여
굴드는 피아노의 정석들을 파괴했으므로 당시 그의 연주는 극단적 호불호의 대상이었으나 점점 그 연주는 전설이 되어가고, 재즈 연주자들에게 그의 바흐는 유독 추앙을 받기도 합니다. 재즈 연주자들의 클래식 연주에서는 종종 노골적으로 굴드를 따라하는 듯한 뉘앙스를 발견하게 되기도 합니다.


과격한 해석과 괴기한 스타일과 달리 그의 연주는 정교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의 해석 또한 집착과 편집증을 떠올릴 만큼 섬세하며 치밀했고, 그의 터치는 강한 울림이 아닌 작은 음량과 맑은 음색을 냈습니다. 악보 대로 연주하는 걸 싫어하면서도 그 누구보다 악상을 치밀하게 계산한 해석가였고, 연주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누구보다도 명확했던 전달자였습니다. 테크니션의 상징 호로비츠조차 고전을 면치 못하던 바흐 작품에 특화된 듯한 굴드의 테크닉은, 그가 왼손잡이였다는 사실을 자주 회자시킵니다.

 

 


 

피아니스트 김별

- 개인 연주회 <마음 연주회> 207회 (2019.03.23. 나루아트센터)
- 이코리아 <김별의 클래식 산책> 2017~2018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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