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간의 관계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해 보자. 불교의 경우에는 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가 있다. 소승 불교는 동남아세아 지역의 불교가 소승 불교인 편인데 말하자면 개인 구원에 머물러 있는 유형이다. 이에 비하여 극동 지역의 불교는 대승 불교에 속한다. 특히 신라 시대의 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로서 대승 불교의 전형적인 예이다.

대승 불교가 기독교식으로 표현하자면 사회 구원에 속한다.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등을 포함한 동남아 지역의 불교가 개인 구원 격인 소승 불교(小乘佛敎)임에 비하여 한국 일본 중국 등을 중심으로 하는 극동 지역의 불교가 사회 구원 격인 대승 불교(大乘佛敎)에 속한다. 옛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불교가 대승 불교였기에 나라를 지키는 불교인 호국불교로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그 바탕에서 신라의 화랑도 운동이 일어나고 조선 시대 임진란 때는 승병을 일으켜 왜적과 대항하려 하였다. 그런데 유학이 중심이었던 조선 시대에는 불행하게도 개인 구원 격인 주자학(朱子學)이 중심을 이루어 사회 구원 격인 양명학(陽明學)은 그늘에 가리워 득세하지 못하였다. 이런 현상이 조선 유학의 한계요 불행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주자학이 아닌 양명학이 주류를 이루어 일본의 사회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렇다면 한국 기독교의 경우는 어떠하였던가? 한국 기독교가 한국의 근대화에 끼친 긍정적인 역할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한국 기독교의 역할을 빼고는 한국 현대사를 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복음을 전하러 온 미국 선교사들 중에는 신학적 보수적인 기풍이 강하였다.

그래서 성경 해석과 민족 현실에 대한 적용 면에서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고로 한국 교회는 개인 구원에 머무는 흐름이 주류를 이루었다. 물론 그런 흐름의 저변에는 일제의 폭압에서 살아남기 위한 현실적인 측면도 있었다. 그런 중에도 1919년에 일어난 3.1 만세 운동 때까지는 한국 교회는 역사 구원 내지 사회 참여에 강한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3.1 운동 이후로 한국 교회는 민족 현실에 대하여 과감하게 태클하지 못하고 개인 구원 내지 내세 소망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 공백을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이 메우게 되었다.

동두천 두레자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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