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글에서는 <두레>란 이름을 찾아내기까지의 과정을 적는다.
청계천 빈민촌에서 열심히 일하던 1974년 1월이었다. 1월 8일엔가 박정희 정부에서 유신헌법이 발표되었다. 그 내용이 여태껏 들어온 민주주의 원칙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었다. 유신헌법을 제정 발표하니 반대하지도 말라 말하지도 말라 모이지도 말라는 식의 조항들이 줄줄이 담겨 있었다.

이에 먼저 성남시의 이해학 전도사와 만나 "이건 아니지 않아.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도 열심히 일으키고 안보도 튼튼히 할려는 건 이해가 가는데 민주주의를 짓밟는 건 안 되잖아. 유신헌법을 반대하면 사형까지 가능하다 하니 국민들이 무서워 말도 못하고 모이지도 못하고 데모도 못하게 되지 않겠나. 이런 법은 인간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기본권을 짓밟는 법이기에 정치 문제가 아니라 선교 문제(宣敎問題)이다."

"그러니 우리들 성직자들 종교인들이 나설 때이다. 일반 시민 학생들이야 나섰다가는 사형이라도 당하면 다칠 터이니 우리 같은 성직자들이 나서자. 성직자들은 어차피 큰 뜻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 아닌가." 이런 대화를 거쳐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모으기로 작정하였다. 그날로부터 작심하고 케토릭 신부님들, 불교의 스님들, 그리고 개신교의 목회자들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하였다.

케토릭 쪽에 안면이 있는 신부님들을 만났으나 호응하려들지 않았다. 실망한 채로 나오면서 이해학 전도사가 투덜거렸다. "신부님들이 처자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래 용기가 없고 움츠러들려 하지. 이것 참 실망인데." 하기에 내가 일러 주기를 "장가를 안 가서 여자한테 안 시달려 봐서 철이 덜 든 것이여." 하며 맞장구를 치곤 하였다.

불교계에는 아는 스님들도 별로 없으려니와 몇 분 만나서 유신헌법 반대를 위한 종교계 성직자들이 뜻을 합하여 시위를 하자는 제안을 하였더니 호응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개신교 목회자들로만 시위를 시도해 보자고 다짐하고는 평소에 사회 정의를 주장하는 교수 목사님들, 국가의 위기에는 목사들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설교하던 목사들을 찾아다니며 취지를 열심히 설명하였다.

이해학 전도사가 추천하는 한 신학 교수님을 찾아갔을 때이다. 둘이서 가서 인사를 드리고 유신헌법 이야기가 대화의 주제로 떠오르자 박사님은 이럴 때가 크리스천들이 사회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던질 때다고 기염을 토하셨다. 우리 둘은 동지를 얻은 기쁨에 서로 눈짓을 나누고는 내가 유신헌법 반대 시위에 대한 계획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해학 전도사가 존경심이 넘치는 마음으로 부탁드렸다.

"우리들 젊은 성직자들이 데모를 하는 자리에서 교수님께서 사회를 맡아 주십시요."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하시겠다는 응답을 하실 것으로 기대하고 부탁드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의외의 반응이었다. 갑자기 목소리를 팍 낮추시더니 소근거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렇게 시국이 어려울 때는 몸조심을 하여야지."

우리 둘은 어안이 막혀 서로 쳐다보자 교수 댁을 물러나왔다. 집 밖을 나서면서 이해학 전도사가 말했다.

"존경 받는 교수가 아니라 개새끼잖아."

내가 고개를 돌리며 답하였다.

"개새끼는 아니고 씹새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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