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일본의 초대 수상 요시다 시게루 박사는 같은 시기에 나라를 이끈 지도자들이다. 둘은 닮은 점이 많은 인물이다. 둘 다 영어에 능통하고 외교에 능란하며 국가 경영에 전략적 능력을 지닌 큰 인물들이다. 그런데 둘에게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다. 그 차이로 인하여 이승만은 비극적인 노후를 맞이하였고 요시다 시게루는 명예로운 노후를 보낼 수 있었다.

그 차이는 후계자가 될 지도자들을 기른 점이다. 요시다 시게루 수상은 수상으로 재임 중에 장래성 있다고 판단되는 소장 지도자들을 선발하여 소위 요시다 정치학교(政治學校)를 열었다.
그들을 토요일 아침 식탁에 초청하여 식사를 나누며 국제 정세를 보는 안목을 길러 주고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을 논의하며 일본이 나가야 할 방향을 논하게 하였다.

그들을 선정할 때에 젊고 유망한 국회의원, 정부의 국장급 엘리트들, 유능한 소장 기업인들 중에서 장차 일본을 이끌어 갈 자질이 있다고 판단되는 인재들을 골라 선정하였다. 이 모임을 그가 수상직에서 퇴임할 때까지 꾸준히 계속하였다. 요시다 수상이 예상한대로 그들 중에서 요시다 수상 이후 일본의 수상이 되어 일본을 경제 대국으로 발전시킴에 기여하게 하였다.

그들 중에서 미끼, 이께다, 오오히라, 다나까 등이 포함된다. 그들 중에 가장 나이 어렸던 국회의원이 다나까였다. 다나까가 수상직을 마친 이후로 요시다 정치학교의 인맥이 끊어지면서 일본 정치가 혼란에 빠져들게 되어 소위 잃어버린 20년을 맞았다. 지금은 아베 수상이 등장하여 일본이 부흥기를 맞는 일에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 점에서는 실패자였다. 자신의 업적을 이어 나갈 후계자들을 기르지 못하였다. 건국 초기에 인재들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그들 중에서 발탁하여 기르지를 못한 채로 이기붕 수준의 3류급 정치가들에 둘러싸여 국가 경영을 펼치다가 4.19로 실각케 되었다. 이 점이 이승만의 위대한 일생에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된 과정이다. 너무나 아쉬운 점이다.

두레국제학교와 두레수도원
두레국제학교와 두레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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