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효의 세상이야기 [제 2.534회]

"흐루쇼프 자존심 살려주고 핵전쟁 막은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

“러시아와 미국 사이에 1960년대와 유사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 옛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해 위기를 일으킨 것과 같다.” 

2007년 10월, 당시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가 폴란드·체코 등 동유럽까지 미사일방어(MD) 체제에 넣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했던 말이다. 

62년 10월의 쿠바 미사일 위기를 기억하는가? 쿠바 미사일 위기는 전 세계를 핵전쟁과 제3차 세계대전의 문턱으로 몰아 넣었다. 당시 케네디와 그의 각료들은 위기 관리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59년 새해, 쿠바에서는 피델 카스트로가 주도한 반란이 성공해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미국은 충격을 받았다. 플로리다 해안에서 불과 90마일(145㎞) 떨어진 곳에 공산정권의 교두보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흐루쇼프는 62년 9월 ‘소련·쿠바 무기원조 협정’을 체결한 뒤 극비리에 60여 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42기의 중거리 미사일과 42대의 장거리 폭격기, 162기의 핵탄두, 5.000여 명의 군인·기술자들을 쿠바로 이동시켰다. 

10월 14일, 미국의 U-2 정찰기가 쿠바 서부지역 에서 거의 완성단계에 있는 미사일 기지를 촬영 했다. 이틀이 지난 10월 16일 국가안전보장회의 비상대책 위원회(ExComm 위원회)가 소집되었다. 

논의된 방안은 세 가지였다. 공중폭격, 육상침공, 그리고 해상 봉쇄였다. 직접적인 무력수단으로 사태를 해결하자는 매파와 해상 봉쇄를 통해 간접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하자는 비둘기파가 팽팽히 대립했다. 

⊙케네디 ‘베를린 가설’에 빠져 일부 오판 
10월 22일 월요일 저녁 7시, 케네디는 TV와 라디오를 통해 차분한 어조로 대국민 연설을 했다. “지난주, 쿠바에서 핵공격 미사일 기지가 건설 중에 있는 확실한 증거를 포착했습니다…

미국은 쿠바에서의 미사일 기지 건설을 서반구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 할 것이며, 소련이 미국에 공격을 가할 경우 미국은 소련에 대해 전면전도 불사 할 것입니다….” 

그러고선 쿠바에 무기를 운반하는 모든 선박에 대해 해상봉쇄를 단행한다고 선언했다.(당시 케네디의 표현은 ‘봉쇄’를 의미하는 blockade 대신 ‘격리’라는 뜻의 quarantine 이었다.) 

또한 14일 이내에 쿠바에 설치된 미사일을 철수 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소련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왔다. 흐루쇼프는 소련의 핵미사일 부대에 비상경계령을 내렸고, 쿠바로 향하고 있던 선박들에 멈추지 말고 계속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크렘린 최고간부회의를 소집해선 “이것은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실제적인 해상봉쇄는 10월 24일 오전 10시부터 시작됐다. 이때 20척의 소련 선박이 정선명령 지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곧 미 해군은 봉쇄선을 지나려는 소련 선박에 ‘멈추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라고 통보 할 참이었다. 

케네디와 그의 각료들이 백악관에서 만약의 사태 를 대비하며 마른 침을 삼키며 지켜보고 있었다. 이 절박한 순간에 해군 정보국에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쿠바로 향하던 20척의 선박들이 공해상에서 멈추거나 회항했다”는 내용이었다.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올 때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는 “잠시 동안이나마 세상은 멈춰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쿠바에 건설 중인 미사일 기지가 그대로 있었다. 해상 봉쇄로 미사일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백악관에서는 다시 강경론에 힘이 실리면서 무력으로 쿠바를 공격하자는 주장이 거세졌다. (내일은 2편으로 이어집니다)

새로운 한주를 맞이하는 오늘도 활기차고 신바람 나는 월요일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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