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효의 세상이야기 [제 2.494회]

말이 실제보다 지나치거나 말만 앞세우고 실력은 그 말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223년, 촉주(蜀主) 유비(劉備)는 221년 부터 시작된 동오(東吳)와의 싸움인 이릉(夷陵) 전투에 출전하였다가 대패하고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면서 제갈량(諸葛亮)과 이엄(李嚴) 에게 아들 유선(劉禪)을 부탁한 후,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승상! 마속(馬謖)은 말이 실제를 뛰어넘는 자니 크게 쓰지 말고 신중히 살피도록 하시오! 하지만 제갈량은 그렇지 않다고 하니 매번 불러다 상의를 하면서 낮부터 밤까지 함께하시오!"」

건흥 5년(227), 제갈량은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 위(魏)나라를 공격했다. 출정에 앞서 제갈량은 후주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린 후에 한중(漢中)을 나와 장안(長安)을 향해 진군했다. 

한중에서 기산(祁山)을 향해 우회하면서 천수(天水), 안정(安定), 남안(南安) 등 3개 군을 접수하고 기산에 이른 다음 장안으로 진군하는 전략이었다. 

위나라는 하후무(夏侯楙)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대적했으나, 남안, 천수, 안정의 농서 지방 3군을 빼앗기고 강유가 촉한에 투항했다. 

그러자 위나라 명제(明帝) 조예는 사마의(司馬懿)를 복직시키고 장합(張郃)을 가정(街亭) 으로 향하게 하였다.

사진출처 : cctv 삼국지
사진출처 : cctv 삼국지

제갈량은 전력상의 요충지인 가정을 지킬 장수로 마속을 보내면서 가정의 길목을 지켜 적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마속은 자신의 능력만을 믿고 적을 끌어들여 역습을 하려다가 도리어 산등성이에서 장합의 군대에게 포위당해 힘 한번 써 보지도 못한 채 참패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제갈량은 할 수 없이 군대를 이끌고 한중으로 퇴각해야만 했다. 제갈량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마속에게 참수형을 내렸다. 

다시 구하기 어려운 장수이므로 살리자고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법을 엄정히 지켜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울면서 마속의 목을 베었다. (읍참마속(泣斬馬謖) 참조) 

마속이 죽은 후, 제갈량은 직접 제사를 모시고, 그의 자식들을 마속이 살아 있을 때 처럼 보살펴 주었다. 이 이야기는 《삼국지(三國志) · 촉서(蜀書) 〈마량전(馬良傳)〉》에 나온다.

사례
못 하겠으면 처음부터 못 한다고 말을 해야지,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치더니 결국 일을 그르치고 말았잖아! 너 때문에 낭비된 시간과 금전이 얼마인가? 왜 다른 사람들이 너를 ‘언과기실’의 사람이라고 평하는지를 이제야 알겠구나!

오늘도 일상생활 속에서 늘 조심하고 언과기실 하지않는 은혜로운 주일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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