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효의 세상이야기 [제 2.486회]  

원소는 건안 3년(198) 유주(幽州)의 공손찬(公孫瓚)을 멸망시키고 청주(靑州), 유주, 기주(冀州), 병주(幷州)를 얻어, 황하 이북의 광대한 땅을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많은 인재를 모았으며, 10만의 정예부대와 1만의 기병을 갖추었다. 

화북을 두고 조조와 원소 사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당시 조조는 원소의 대군 외에 또 하나 해결해야 할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동방에 있던 유비(劉備)였다. 유비가 원소와 힘을 합쳐 쳐들어 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안 4년(199) 정월, 조조는 신속하게 부대를 이끌고 서주(徐州)의 유비를 친 후, 조조는 하비성(下邳城)을 공격하여 유비의 대장 관우(關羽)를 생포했다. 유비는 패주하여 원소에게 투신했고 장비(張飛)는 도망했다. 

사진 : 삼국지 CCTV
원소에 의해 하옥되는 전풍(사진출처 : 삼국지 CCTV)

원소의 모사인 전풍(田豊)이 그 기회를 틈타 허창을 칠 것을 건의하였으나 원소는 아들이 병이 났다는 등의 이유로 출병하지 않았다. 조조가 성공리에 출정을 마치고 관도로 돌아오고 난 후에야 원소는 비로소 여러 장수를 모아 허창 공격을 의논했다. 

모사 전풍은 이미 형세가 변했다며 원소에게 뒷날을 기약 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원소는 전풍이 군심을 동요시켰다는 이유로 감옥에 넣어 버리고 허창 공격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이상이 바로 ‘성동격서’의 전략이 나온 관도 전투의 역사적 배경이다.

건안 4년(199) 6월, 원소는 저수(沮受)를 감군(監軍)으로 하여 10만 대군을 이끌고 그의 근거지인 업성(鄴城)을 출발하였다. 원소는 황하를 건너 백마(白馬)를 손에 넣고 관도를 탈취하여 허창을 함락 할 계획을 세웠다. 

조조는 곽가(郭嘉)와 순욱(荀彧) 등의 모사와 의논한 결과, 당시의 형세와 쌍방의 정황 등을 고려해 볼 때 방어가 최선책이라고 판단하고, 그해 8월 주력부대를 관도 일대에 포진시키고 원소를 기다렸다. 

관도는 허창에서 200리(80여 킬로미터) 거리에 불과하여 인후(咽喉)에 해당하는 전략적 요충으로, 만약 관도를 잃으면 허창의 방어선이 뚫리는 셈이 된다. 원소는 병사가 많았으므로 조조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으로 나왔다. 

원소는 안량(顔良)에게 1만 군사를 주어 조조군의 전략 요충지인 백마성(白馬城)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조조군을 섬멸하려고 했다. 충분히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까 군사를 나누어 일거에 밀어붙이겠다는 생각이었다.

안량의 공격으로 백마성이 위급해지자 수비대장인 유연(劉延)이 조조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긴급 보고를 받은 조조는 대책 회의를 열고, 대책 회의에서 모사 순유(荀攸)가 계책을 내놓았다. 

“원소의 근거지인 업성을 공격하는 척 하십시오! 원소는 반드시 군대를 나누어 업성을 구하러 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틈을 타 정예부대를 보내 백마성을 포위하고 있는 안량의 군대를 습격하는 것입니다!” 

조조는 이 계책에 따라 군사를 이끌고 연진(延津)으로 출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원소는 군대를 몰아 급히 연진으로 달려갔다. 순유의 예측대로 원소가 조조의 계략에 빠져 군대를 움직이자, 조조는 즉시 방향을 바꾸어 백마성으로 향했다. 

백마성을 포위하고 있던 안량은 조조가 연진과 업성을 공격하러 군대를 움직였다는 소식을 듣고 느긋하게 있다가 조조의 기습을 받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조조에게 상빈(上賓)의 대우를 받던 관우에게 안량이 죽자 안량이 이끌던 군대는 와해 되었으며, 이로써 백마의 포위는 풀리게 되었다.

한편, 원소가 연진에 달려가 보니 연진은 무사 했다. 적의 함정에 빠진 것을 알게 된 원소는 급히 백마성으로 달려갔으나, 성을 공격하던 군사들은 멸망당하고 안량은 이미 죽은 후였다. 
원소의 공격으로 부터 백마성을 더 이상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조조는 백성들을 이끌고 백마 성을 빠져 나왔다. 원소가 백마성을 점령하면 백성들을 살육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원소는 유비와 문추(文醜)를 보내 조조를 추격 했지만 조조의 계략에 빠져 대패하고 명장 문추를 잃었다. 문추를 누가 죽였는지 정사에는 기록이 없다.(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는 관우 가 죽인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관우가 아니라 혼전 중에 누군가에 의해 죽었다)

원소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조조는 일단 관도로 후퇴했다.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원소는 10만의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반면, 조조는 겨우 1만의 군대 밖에 없었다.(실제는 3∼4만이었다고 한다.) 

원소의 군대도 관도까지 추격해 와 진영을 구축했다. 원소군과 조조군은 반년 동안이나 대치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초조한 쪽은 군량이 부족한 조조측 이었다. 

이때 원소의 모사 허유(許攸)가 그의 계책들이 받아 들여지지 않는데 불만을 품고 원소를 배반하고 조조의 진영으로 몸을 의탁해 왔다. 

허유는 조조가 전 병력을 관도에 포진하고 있으므로 텅 빈 허창을 습격 할 것을 원소에게 건의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조조는 허유의 계책대로 원소의 군량미가 쌓여 있는 오소(烏巢)를 기습했다. 조조가 오소를 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원소는 극소수의 구원병만 보내고, 주력부대를 동원해 조조의 관도 진지를 공격했다. 

숫자에 의거하여 일거에 밀어 붙이겠다는 계산이었다. 조조군은 방비만 할 뿐 나와 싸우지 않고 시간을 끌었으며, 그 사이에 조조군의 특공대가 오소를 습격하여 원소의 군량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구원병을 보내 오소를 지키자고 건의한, 지모와 용기를 겸비한 명장 장합(張郃)은 모함을 받아 위험에 빠지게 되자 조조에게 투항해 버렸다. 

오소가 불탔다는 소식을 접한 원소군은 크게 동요하여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 틈을 타 조조군은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원소군은 크게 패하여 10만 명의 군사 가운데 7만 명 이상이 전사하고, 원소는 800여 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북으로 도망쳤다.

관도의 전투에서 승리한 조조는 순욱의 주장에 따라 201년 4월 황하를 건너 북상하여 창정(倉亭)의 전투에서 또다시 원소의 군을 깨뜨렸다. 

원소는 업성으로 돌아갔고, 조조는 허창으로 개선했다. 원소는 조조에게 대패한 충격으로 건안 7년(202) 4월에 병이 나 피를 토하다가 5월에 사망했다. 관도의 전투는 이렇게 끝났고, 수년에 걸친 조조와 원소의 경쟁은 막을 내렸다. 이 이야기는 《삼국지(三國志) · 위서(魏書)》에 나온다.

사례
바둑에서도 우상변의 말을 공격하기 위해서 먼저 우하변의 말을 공격하는 척 하는 ‘성동격서’의 전법을 많이 사용한다.

오늘도 동장군이 일찍 찾고오고 싶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건강관리에 소홀함이 없는 즐거운 주말을 맞이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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